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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쟁 Apr 14. 2022

좋아하는 취항지

오늘부터 승무원

 직업이 승무원이라고 하면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는 가 본 도시 중에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심지어는 비행한 지 얼마 안 된 후배 승무원들도 상대적으로 연차가 오래된 선배였던 나에게 묻곤 했다. 승무원들은 다음 달엔 어느 도시를 가볼까 하며 관록 있는 도서관 사서에게 책을 추천받듯이 도시를 추천하고 추천받기도 했다.

  보통 나는 취항지를 추천하기 전에 반드시 묻는다. "가서 뭐할건데? 하고 싶은게 어떤건지 알려줘봐" 어느 도시가 좋더냐는 질문의 의도엔 보통 매료당하고싶은 욕구가 숨어있으므로 나는 보다 정확한 '매료하기'를 위해서 다시 되묻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을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여행자의 관점, 즉 무엇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 확인해야 한다.


 직업으로서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보니, 확실한 건 여행엔 품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품이란 것이 시간, 돈이며 기본적으로 댓가를 치르는 만큼 대부분 만족할만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해외든 국내든 살기도 여행하기에도 돈만 많으면 어디든 좋다는 것에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고로 당시에 시간 많고 돈 있는 이십 대 한량이었던 나는 어딜 가든 즐거웠다. 그러나 권태기처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가 시들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보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 돌며 산해진미와 유명한 곳들을 밟아보니 사람 사는데 거기가 거기 같고 심지어는 흥미도 떨어져서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살던 도시로 돌아오는 일도 잦아졌다. 이후로 다시 어떤 계기로 삶의 생기를 되찾은 후엔 나의 도시 여행은 전과 조금 달라졌다.


 남들이 가는 곳, 가봐야 한다는 곳보다는 나만의 장소를 찾는 곳의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돈이 없어도 좋은 곳,  둘째는 혼자 가도 좋은 곳, 셋째는 누구와 마주쳐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그 기준들이었다.


 돈이 있어야 기분을 낼 수 있는 곳들은 대부분 소비하는데 에너지를 쏟기 마련이어서 그 장소가 주는 채움을 얻기 힘들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장소가 좋았다. 혼자 가도 좋은 곳을 기준에 넣은 이유는, 혼자 가도 좋은 곳은 둘이 가도 반드시 좋기 때문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런 장소들은 나중에 누구와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하며 걸음 하곤 했다. 수많은 도시들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지금 당장은 함께하지 않지만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은 장소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렇게 골라진 장소들은 특정 사람에게 엽서를 사서 쓰거나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또 취항지에서는 대부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걸고 혼자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획득했다. 두 번째 기준은 치안상의 이유나 예의상 동료 승무원과 동행하곤 하던 스스로 지운 의무감을 내려놓게 하기도 해 주었다. 세 번째 기준의 누구와 마주쳐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은 내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된 곳이었다. 미술 관련 책만 취급하는 헌책방에서 만난 친구는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앞서 제시한 두 가지 기준에도 부합하며 세 번째 기준까지 성공적이었을 때 비행하는 곳마다 나는 부지런하게 꽤 만족도가 높은 나만의 장소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예전엔 습관처럼 가던 아울렛몰, 분위기 좋은 bar 혹은 맛집 레스토랑, 지갑 없인 아쉬운 예쁜 가게들이 많은 거리 등등은 탈락했다.


  나만의 장소 찾기의 리스트에는 시드니의 로열 보태닉 가든과 그 옆의 현대 미술관이 있다. 책 한 권과 선크림, 물 한 병이면 오전이든 오후 건 온종일 있다 와도 좋았다. 그러다 강가를 따라 달리거나 본다이 해변을 달렸다. 호주의 연중 내리쬐는 경쾌한 음악 같은 햇볕과 수영복과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가벼운 공기처럼 떠나닐 수 있었다. 런던의 피카델리에는 음악 하는 거리 예술가들이 수준급 실력으로 자신의 음악을 경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vip로 모셨다. 일터에서는 늘 귀빈들을 모시던 나 같은 직업의 사람은 그의 진심을 받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런던 곳곳에서 새벽에 열리는 앤티크 마켓에는 나 같은 젊은 동양인 여자는 매우 드물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뻘 되는 사장님(?)들은 내가 한마디 질문을 하면 열 마디 다정한 대화를 나누길 즐겨했다. 물건을 사이에 두고 흥정이나 하던 예전에 내가 알던 쇼핑의 정석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나는 휴가를 내서 런던에 일주일을 머물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사고파는 일보다 사람이 좋아서 나온 그들은 결국 가보로 갖고 있던 100년 가까이 된 찻잔 세트나 귀여운 도자기 종 같은 것을 선물로 주었다. 결국, 그들과 사랑에 빠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며 나 역시 늘 챙기고 다니는 한국 전통 물건을 모티브로 한 기념품을 건네며 여행을 마쳤었다. 한복이 곱게 그려진 카드를 보며 환하게 웃던 할아버지가 그립다.


 이렇게 몇 해간 그만두기 전까지 나만의 장소 리스트를 채워가던 어느 날 그날도 후배 승무원이 좋아하는 도시가 어디냐고 물어왔다. 일 년을 비행한 그녀의 눈엔 푸른빛 호수 같은 호기심과 삶에 대한 열정이 빛나 보였다. 나는 어느 도시든 아름답다고 그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각자의 일이라고 했다. 워 하며 박수를 짝짝 치던 그 친구도 연차가 채워지면서 자기만의 리스트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적어도 도시마다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하나쯤 적어나갔을 것이다. 비행을 그만둔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다. 새로운 곳을 탐색하며 기웃거리던 발걸음은 여전하지만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평생 함께할 여행이 시작된 이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항지는 집이 되었다. 더이상 사진을 찍지 않아도 좋은 곳, 새로운 누군가를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 놀라운 대화가 계속되는 곳. 언제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울어도 괜찮은 곳. 소문에 의하면 결혼이란 여행은 모두의 최애 장소는 아니었지만 역시 가보고 말할 일이었음을 깨달으며 오늘도 새롭게 우리의 리스트를 적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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