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끝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방식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상실은
문득 온다.
어떤 날은
갑자기 소식으로 오고,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는데
그리움처럼 올라온다.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일이 끝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남는 건
사건이 아니라
공백이다.
나는 그 공백을
처음엔 부정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고
바쁘게 움직인다.
그런데 상실은
바쁨을 이긴다.
문득 비어 있는 자리에서
마음이 내려앉는다.
이상한 건,
우리가 잃는 건
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실은
내 안의 한 부분을 같이 가져간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나.
그 시간에 익숙했던 나.
그 꿈을 믿던 나.
그래서 상실이 아픈 건
떠난 것 때문만이 아니라
함께 사라진 ‘나의 모습’ 때문이다.
법구경이 건네는 태도는
상실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다 지나간다”라고
쉽게 위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무상은 차가운 진리가 아니라
따뜻한 현실이다.
모든 것은
오고
머물고
떠난다.
그 사실을 모르면
상실은 벌이 되고
그 사실을 알면
상실은 자연이 된다.
자연이 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아프지 않게 된다.
상실의 한복판에서
마음은 자주
붙잡는 손을 놓지 못한다.
왜 떠났을까.
왜 끝났을까.
왜 더 오래 가지 못했을까.
그 질문들은
사랑에서 나오지만
반복되면
칼이 된다.
그래서 상실 앞에서 필요한 건
답을 찾는 힘이 아니라
붙잡는 손을 알아차리는 힘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간다.
그 숨의 왕복을 따라
내 손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한 번만 본다.
지금, 상실이 있다.
지금, 그리움이 있다.
이 문장은
상실을 해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실이
나의 전부가 되지 못하게 한다.
“나는 끝났다”가 아니라
“상실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실은 하나의 현상이 된다.
현상이 되면
나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울지 말아야 한다는 선택이 아니라
울어도 된다는 선택.
잊어야 한다는 선택이 아니라
기억해도 된다는 선택.
상실은
무언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품는 일이다.
떠난 것은 떠난 채로 두고
남은 것을 남은 채로 본다.
남은 것에는
내 호흡이 있고
내 하루가 있고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시간이 있다.
그래서 상실은
끝이 아니라
방식의 전환이다.
이전처럼 사랑할 수 없을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전처럼 살 수 없을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상실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두 가지가 남는다.
떠난 것.
그리고
남은 나.
나는 오늘
남은 나를
조용히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