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내면 아이를 다독이는 아침
"나랑 메모리 게임 할 사람 여기 붙어라~~~"
"..."
"엄마~~ 나랑 놀아줄 사람이 없어~~~"
저녁 내내 외치는 첫째의 아우성에 엄마도 밥 좀 먹자, 엄마가 너 심심하지 않게 하려고 동생을 만들어 준거다, 그림 그리고 있어라 등의 말들로 타일렀으나 좀처럼 슬픈 표정이 가시지 않았다. 남편도 회식이었고, 친정 엄마도 친구가 자리돔을 주셔서 단장하고 배달해 주느라 정신이 없으셨고, 하필 어제는 애들 옷 정리를 하는 바람에 널어야 할 빨래도 개어야 할 빨래도 수두룩이었다.
그때 둘째가 다행히도(?)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 했고, TV의 도움을 받는 동안 후다닥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거의 다 마쳤을 무렵 번호키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이른 귀가에 "와! 구세주다!!" 하고 외쳤으나, 회식하면서 맛있게 먹은 한치 한 접시를 갖다주고 다시 2차를 가야 한다고 했다. 망할. 저녁 다 먹고 치우는 8시 30분에, 아이들 얼른 재워야 아침이 전쟁이 아닌 걸 알면서 지금 갖다 주는 의미가 뭐지? 미리 연락이라도 해 주든가, 물어라도 보든가. 약 올리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도 눈앞에 그림의 떡처럼 놓인 한치 한 접시가 원망스러웠다.
회식이라 늦게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그때가 좋았다. 남편이 와서 반가웠고 이제 애들이 심심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 몇 초 동안 엄청난 기대를 했나 보다. 남편이 다시 나가고 난 뒤 너무 큰 실망감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신경을 얼마나 썼으면 손등까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싱싱한 한치를 먹으라 하고 애들을 봐줄 것도 아니었으면서 도대체 왜 지금이었던 거야.
남편에게 분노의 메시지를 보내고 엄마한테 sos를 쳤다. 다음 날은 남편 휴가로 저녁은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외식을 하고 싶었으니 냉장실에 넣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만저만해서 한치가 생겼는데 냉동에 넣는 게 낫겠지 하고 물으니 지금 집으로 온다고 하셨다. 살아있는 한치, 한 입 먹겠다면서 오신 엄마. 진심으로 드시고 싶으셨을까? 사위를 생각하는 장모의 마음이자 화가 난 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한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 같았다.
나의 얘기를 듣고선 술까지 먹는 남편이었으면 이혼한다고 했겠다며 엄마가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하셨다. 남편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걸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너는 이렇게 착하고 능력자인 남편한테 나쁘게 굴면 안 된다고. 정말 못 됐다고. 엄마를 보라고, 엄마는 어땠겠냐고.
"그건 엄마 인생이었잖아." 하고 내 입장을 반박하려는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꾸욱 감정을 눌렀다.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지지리 못나서 남들이 착하다 좋다는 남편을 쥐 잡듯이 잡으려 하고 있는 걸까. 그냥 "고마워" 하면 될 것을 완벽하게 네 식구가 모여야 완전한 가정이 된다는 명제 아래 거짓이 되는 순간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 남편의 긴긴 문자를 받고 눈물이 났다. 뭔가가 잘못돼도 나는 잘못된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가 남편을 기다리는 이유는, 어린 시절 아빠를 기다리는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넓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저 하교해서 집에 가면 저녁에 아빠가 모여 함께 저녁 먹는 집. 저녁 먹고 마실 나오듯 집 앞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
부모님의 불화 속에서 채워지지 못한 결핍을 혼자 성당을 나가며 열심히 채워나가려 애썼고, 그 안에서 하느님은 내게 지금의 밝고 사랑 많은 남편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아이들에게 다른 건 못 채워줘도 가정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사랑만큼은 놓치지 않고 싶었다. 나와 남편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회사일을 열심히 하고 잘하는 남편으로부터 양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육아는 우리에게 버거웠던 것이다.
내면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 우리 가정에 난 구멍들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믿고 신뢰하는 것밖에 없다. 함께 있지 못해도 우리는 서로를 매우 생각하고 아낀다는 것, 그러니 함께 있는 시간은 더욱 귀하다는 것. 아이들에게도 그런 아빠의 사랑을 자꾸 말로 표현하고 전해야겠다. 그게 아이들이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결핍은 그저 하느님께 맡겨드린다. 오늘도 이렇게 나를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과 손길에 감사하면서. 우리 집 가장을 지켜주시길 기도드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