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색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고단하다.
아침엔 아침이라서 고단하고 저녁이 되면 저녁이라서 더 고단하다.
아침에 일하러 밖에 나가면 아침에 맡을 수 있는 아침 냄새가 있는데- 밤이 머금고 있던 수증기 냄새, 도로에 착 가라앉았던 매연 냄새, 햇살이 만물 위에 내려앉으면서 만들어지는 냄새,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풀썩이면서 나는 냄새 등등- 그 냄새를 맡으면 그게 또 그렇게 고단하게 느껴진다.
하루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고단한 기분이 든다. 정말이다.
아침에 기운이 팔팔하고 생생한 건 두 살 이전의 아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아침이 이리 고단하니 하루를 사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 저녁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퇴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넋도 나가고 혼도 빠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나 지금 피곤하니까 건드리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고 내 앞길도 막지 말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저녁시간, 그런 퇴근길을 살아내다가
우연히 혹은 갑자기 필요한 것이 생겨서 상점에 들어가면 거기엔 내가 집에 가는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내가 일하던 시간에 일을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어쨌거나.
상점에서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은 계산원이다. 어둑해지는 저녁시간 이들은 모두 고단하다.
바코드를 띡 띡 띡 찍고 물건을 봉투에 넣어주는 손끝엔 영혼이 없다.
나는 이걸 사서 집에 갈 거지만 내 앞에 서 있는 계산원은 언제쯤 집에 가게 되는지.
얼른 이 사람도 따뜻하고 포근한 자기 집으로 빨리 가면 좋겠다...... 생각해본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에 생긋 (너무 과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적당하게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손톱 색깔이 참 예쁘네요
목걸이가 멋지네요
반지가 예뻐요
보라색이 잘 어울려요
멋진 이름이에요
그 무엇이 되었든 그의, 혹은 그녀의 상반신에서 무엇이든 찾아서 예쁘고 멋지다고 짧게 말하는 거다.
이렇게 하는 데엔 10초도 안 걸린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 내가 제일 많이 써먹는 말은
네일 컬러가 예쁘네요
지금 사는 동네에서 손톱에 무언가 바르지 않은 여자는 거의 없으니 (나는 매니큐어 안 바르는 여자) 칭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아도 되고 큰 의미도 없고 거슬릴 그 어떤 것도 없어서 툭 내뱉기가 좋다.
그런데 이런 나의 짧은 말에 되돌아오는 놀라운 결과가 있다.
나의 보푸라기 같은 mention에 모두들 웃어준다는 것.
내가 그네들을 웃게 만들었다는 것.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들은 웃는다. 웃었다.
여태껏 무뚝뚝하게 아무 말도 안 하거나 Hum..... well... 이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나에게 땡큐라고 말한다. 말하는 동안에도 이들은 내게 웃어준다.
목걸이가 예쁘다고 말하면 내게 그 목걸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기도 한다. 설명하는 동안 내게 웃는다.
듣는 나도 내내 웃는다.
계산을 끝내고 물건을 받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라고 서로 인사를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누구든 나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만 해 봐라 나는 너를 찔러줄 테다 라는 심정으로 상점에 들어갔지만
상점에서 나와 집으로 갈 때까진 웃는 입꼬리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개미 눈물만큼의 따뜻함을 내내 잃지 않고 살고 싶다.
해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잃어버리기 쉬운 일이라
지켜내기가 어렵다.
사진-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