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언어
나의 하루는 숫자가 글자보다 많습니다
눈을 떠서 내가 처음으로 보는 언어는 무엇일까. 언제나 비슷한 하루를 복기해본다. 일어나자마자 폰을 본다. 처음으로 보는 언어는 숫자다.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시간을 확인한다. 내가 지금부터 얼마나 더 쉴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놀 수 있는지도 확인이 필요하니까. 측정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니까.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여행지에서도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숫자가 있다.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잠들었는가. 내 하루를 측정해본다. 어떤 일이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수치로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고 생각보다 큰 사유가 필요한 일이라 그냥 물리적인 시간만 본다. 나는 오늘 여섯 시간 잤고, 회사에 열 시간 있었고, 삶을 굴리기 위해 썼던 시간이 몇 시간 된다.
침대에 눕는다. 새벽 한 시다. 하루가 온전히 마무리 되지 않았음에도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보단 체념한다. 내일도 또 이렇게 지나가겠지. 하루가 무료하다는 것에 분노할 만큼의 기력도 남지 않을 만큼, 하루는 큰 열량을 소모하고 끝이 난다.
언어를 교환해오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간다고 딱히 그 나라 언어를 공부하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인삿말, 흥정할 때 쓰는 말, 길을 묻는 말 등 여행에 유용한 표현들이 정리되어 있겠지만 찾지 않는다. 나는 일상에서 그리 활발하게 인사할 일도 없고, 흥정할 일을 만들지 않고, 길을 묻느니 틀리고 마는 사람이다. 일상에서 하지 않는 짓을 여행지라고 딱히 하고 싶지 않다. 돈은 유로로 교환했지만, 언어는 내가 가진 언어를 그대로 들고 간다.
별 계획 없이 여행을 시작한다. 재택근무를 하다가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간다. 공항버스는 타 본 적이 없으므로 괜한 시도 하지 않고 지하철을 탄다. 공항철도에서 환승해서 공항으로 간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항상 공항철도를 타고 집에 왔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휴가를 나와서도, 복귀하면서도 불안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공항은 언제가도 불안하다.출발할 때나 도착할 때나 불안하다. 군인이나 여행자나 내게는 잠시 머무는 신분 같아서 불안하다.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밤 열시다. 발권을 담당하는 이들은 피곤해보인다. 그들이 단체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 외국어를 쓰며 주로 일을 할 그들에게 모국어가 반가울까. 모국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안녕' 말고 '출구'를 알려주시겠어요?
스페인에 간다는 말에 친구들은 'hola'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해줬다. '안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친구들 대부분 아는 스페인어는 'hola'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뱉기 전에 내 뒤에 출구가 있나 확인해본다. 관계에서도, 여행에서도. 여행 동안 내가 제일 먼저 배운 스페인어는 '출구'를 뜻하는 'salida'다. 'salida'를 확인하고 나면 그때서야 말한다. 'hola'!
내가 안녕을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면, 그것은 출구를 모르기 때문이다. 출구를 알지 못한다면 섣불리 안녕을 말할 수 없다. 출구를 찾고 나면 안녕을 건네기도 전에 다른 출구를 향해 전진한다. 다음엔 어딜 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관광지이름 대신 '출구'라고 대답해야 맞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