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다
나 런던병에 걸린 것 같아.
유럽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특정 국가나 도시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 여유가 될 때마다 그곳에 가고 싶은 욕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인가.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었기에 썩 공감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내가 '유럽병'을 호소하게 되었다. 유럽병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 자체에 도취 되고, 유럽에 대한 학습된 낭만을 실현한다는 것도 그 요소 중 일부다. 주로 명절연휴를 활용해서 유럽을 가기 때문에 집안의 잔소리로부터 자유롭다는 것도 크게 작용한다.
유럽병은 딱히 어디서 걸렸다기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것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에서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권태로운 순간도 많았다. 당위성에 젖어서 걷던 날들이 훨씬 많았다. 내가 많은 곳을 다녀왔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도 크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관광지를 유명하다는 이유로 갔던 경험은 여행의 필수과정이 되었다.
얼마 전 설연휴에는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정말 좋았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 자체의 매력도 있겠지만 여행의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이젠 아무리 좋은 미술관이어도 고전 위주면 내게 별 감흥 없다는 것을, 성당은 외관만 봐도 내겐 충분함을, 현대미술관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궁전과 정원에 환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매치기를 대비해서 자물쇠를 해둔 백팩은 유럽여행을 시작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함께해왔고, 숙소 고르는 요령이나 도시별 이동과 관광지 동선 짜는 법에 대해서는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여행에서 사소한 부분이지만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 때 뿌듯하다. '적응'이라는 기술 자체의 숙련도가 높아지면 여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요긴하게 쓰여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삐그덕거리는 부분도 많고 동선과 많이 꼬였다. 오히려 그때는 실수를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이탈리아에서는 기차를 한 번 놓치고 나 자신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다. 능숙해져서 여유가 늘어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빡빡해진 느낌이다.
올해 추석연휴에는 뉴욕에 가려고 티켓을 사뒀으나, 설연휴에 이탈리아에 다녀오고 다시 유럽병이 도져서 독일행티켓으로 바꿨다. 지금은 내년 설연휴에 어디를 갈지 고민하고 있다. 물론 유럽 안에서. 모든 도시들을 다 돌아다니고 나면 괜찮아질까.
엄청난 것을 깨닫고 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구글지도에 저장해둔 유럽도시들이 늘어날수록 그 수많은 도시들이 결국은 내 몸의 장기들처럼 느껴진다. 이미 내 안에 있었으나 그곳에서 발견했다고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가.
일 하다가 헤매면 짜증나는데 유럽에서 헤매면 여행자라는 신분 때문인지 그것조차 낭만적이고 합리화도 잘 된다. 어차피 헤매야하는 삶이라면, 유럽에서 좀 더 너그럽고 매혹적으로 헤매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유럽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딱히 낫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손 닿을 거리에 있는 백신을 모른 척 하고 오늘도 유럽여행 계획을 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