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행 때마다 그렇게 걸었는가
첫여행
첫 외국여행은 작년 가을이었다. 첫 직장의 첫 휴가였고,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왜 유럽이었냐고 묻는다면 이제 나도 직장인이 되었고 휴가라면 유럽 정도는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에 대한 당위성이 전혀 없음에도 '저도 유럽에 간 적이 있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계획하는 것도 싫어했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날에 숙소를 예약하고 짐을 챙기며 밤을 꼬박 새우고 비행기를 탔다.
누군가에게 유럽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유럽에 안 가본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싫어서 간 여행이기에 최대한 많은 국가를 가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열흘 동안 세 국가를 갔다. 남들은 학생 때부터 간다는 외국을 이제야 가니까 내 발로 밟은 도시가 한 군데라도 더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결과, 열흘 동안 내가 간 도시는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이다.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넘어가면서 한 시간 정도 머물렀던 브뤼셀에서도 비 오는 돌길 위를 캐리어까지 끌고 오줌싸개 동상을 보러 갔다. 하나라도 더 봐야 했으니까. '저 오줌싸개 동상 보고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발에 피가 나도록 걷기
아침에 일어나면 구글검색으로 관광지 리스트를 모조리 뽑아서 하루에 열 군데 이상을 마치 퀘스트를 해결하는 게임캐릭터처럼 돌아다녔다. 덕분에 몇 달 전부터 여행계획을 세웠다는 이들보다도 많은 것을 봤다. 혼자 발이 터지도록 열흘 내내 돌아다녔다. 아침 관광부터 야경까지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면, 숭고한 여행의 의미 대신 발바닥의 피범벅인 상처들이 보인다.
여행이 끝나고 회사 사람들이 물었다. 어디가 좋았어? 뭐가 재밌었어? 어떤 게 맛있었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다 비슷했구요, 이름 모를 공원에서 쉴 때가 제일 좋았구요, 식료품점에서 산 빵 먹으면서 돌아다니느라 식당은 거의 안 갔어요.
올해 5월에는 일본에 다녀왔다. 여행패턴은 그대로다. 열흘간 오사카-교토-고베-도쿄를 돌아다녔다. 스피드퀴즈를 풀듯이 '은각사'라고 정답을 외치고 나서 다음 문제인 '금각사'를 풀러 달리는 느낌이었다. 여행이 끝나면 한동안은 발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다니기도 한다. 살도 빠진다. 스페인의 순례길을 따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이미 순례길 걷듯 여행 때마다 미친 듯이 걷고 있으니까.
당위성 범벅
몇 달 전 추석 연휴 때도 빨간날을 보니 여행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유럽의 모든 도시를 가봐야만 할 것 같고, 직장인의 연휴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많이 돌아다니려면 해가 늦게 지는 나라가 좋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다녀왔다.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여행을 가야만 할 것 같고, 딱히 엄청난 감흥이 있는 것은 아닌데 여행을 가서는 뭔가 엄청 많이 봐야만 할 것 같다. 제일 혐오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당위성 부여인데 어느새 내 여행은 당위성 범벅이 되었다. 꽈배기에 설탕 묻히듯이 나란 꽈배기에 굵은 입자의 당위성을 잔뜩 묻힌 것 같다.
왜 여행하는가
발에 피가 나도록 걷는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묻는다. 왜 그런 여행을 하는 것이냐고.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 등등 학습된 대답들 말고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나의 대답은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로 끝났던 것 같다.
다만 이번 여행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눈 뜨면 내일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나.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도 많으면서 내일이 오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별 공포가 없었던 것 같다. 여행 내내 그런 나의 태도가 오만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여행의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미 내년 설 연휴와 추석 연휴 티켓을 사버렸다. 이젠 슬슬 대답할 필요가 있어서 여행을 복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왜 여행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