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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초록 Oct 22. 2021

4화. 모두가 그 아이들의 보호자다

대국민팀플: 18세 이상 보육원 아이들 퇴소 정책

브런치북 9회 응모작

대국민팀플

4화. 모두가 그 아이들의 보호자다      




열여덟은 어떤 나이인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만으로 열여덟이면 보육원에서 퇴소한다. 매년 약 2천 5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퇴소 대상자가 된다. 정착 지원금은 고작 500만 원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보다 불안한 일자리라도 얻어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급해진다. 비슷한 속도, 비슷한 궤도로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일상에 진입하는 일은 요원해진다. 이 세상이 가져도 되는 옳은 모습일까? 부모, 혈연관계인 양육자, 보호자가 없이 자랐다는 것은 그저 우연한 일이다. 그 우연한 사실이 누군가의 인생에 필연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차이와 차별을 갖게 하는 사회는 과연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이자 시민들의 방관이다. 우리 모두가 이 사회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보호자여야 한다. 

  MBC뉴스의 어느 기사에서 퇴소 대상자인 학생이 했던 한 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먼저 퇴소를 경험했던 보육원 언니들이 말하기를, ‘퇴소하는 날 당일 아침은 꼭 먹고 나오라’고 했다는 얘기. 퇴소 후에는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끼 식사 값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그 아침을 떠올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 문제가 삼켜지질 않는다. 언젠가 그만한 돈을 벌어 은퇴한다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짓겠노라고, 어엿한 제 밥벌이 스스로 해내는 힘을 기를 때까지 삼 시 세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들겠노라고 꿈 꾼 적 있었다. 

  ‘지금 당장 내가 재벌이면 얼마나 좋을까?’ ‘왜 재벌들은 (할 수 있는데) 세상을 뒤엎어 바꾸고 싶지 않을까?’ 때마다 생각하고 궁금해 했다. 물론 그들에게 그런 의무는 없지만, 세상의 변화를 보고픈 욕망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나로서는 의아하고 아쉬울 때가 있다는 뜻이다. 재밌는 건 무의식중에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니고 하필이면 재벌을 먼저 떠올린 걸 보면 정치와 입법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보다 자본으로 바꾸는 것이 빠르고 명확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여하튼 어마어마한 자본이 지금 당장 우리에게 있다면 세상을 뚝딱 바꿔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상이란 또 그렇지가 않다. 자본을 쥔 자들, 공권력과 예산을 쥔 자들은 주로 느리고 태평하다. 올해도 또 2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허허벌판으로 내몰린다.

  열여덟은 어떤 나이인가. 나는 열여덟에 무엇을 했나. 부모님 슬하에서 안락한 가운데 공부했다. 걱정도 우울도 물론 있었다. 학업과 경쟁에 내몰려 피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다른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대학 진학은 부모님의 지원 아래 당연히 예정된 일이었다. 예쁘고 좋은 것들을 적당히 가질 수 있었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으로 짧은 연수, 홈스테이 프로그램, 혼자 여행해보기 등을 부지런히 경험했다. 대학에 진학했고 하고 싶은 직업군도 경험해보고 나름대로의 갭 이어도 가질 수 있었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가진 시간을 조금 떼어놓았다가 읽고 쓰고 창작하고 여행하며 주변을 향유하는 말미도 가지며 산다. 

  열여덟에서 서른셋. 장장 십오 년이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듯 누군가에게는 다채롭고 다정한 인생의 전성기일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 함께 경쟁하고 성장해나간 동기들, 더 큰 꿈을 꾸어도 좋다고 용인하고 격려해주었던 사회의 분위기와 큰 장애물은 없으니 어디 한 번 신나게 살아보라는 무언의 시그널. 그 모두의 조력을 받아 나는 지금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마저도 특권이었다.        


여전히 많이 어리고 

  서른 줄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의 삶을 돌아보는 눈이 새로워졌다. 십 대 시절 나는 얼마나 미숙하고 어렸고 아는 것보다 혼돈하고 무력한 것이 훨씬 많았는지. 아이들에게 어느 시점까지 가르침과 조력과 돌봄이 필요한지. 언제야 비로소 혼자인 내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지낼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필자는 스물여섯 가을에 경제적 자립을 했다). 열여덟이던 때의 나는 이제 다 컸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이것도 저것도 다 잘 해낼 수 있고 곧 어른이지 않느냐고 의기양양 했던 기억도 난다. 바보 같은 소리다. 그간의 감각이 모두 틀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뒤에 버티고 선 보호자가 있기 때문에 뭐든 ‘해볼 수 있었던’ 것이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맨 몸의 열여덟은 세상에 혼자 던져지기에는 너무나 어리다. 여덟 살과 뭐가 다른가. 열여덟의 학생은 여덟 살 아이가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울고 있을 때 일으켜 세워주고 상처 난 무릎을 털어주고 달래줄 수 있는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열여덟이 걸려 넘어질 돌부리가 세상 천지에 얼마나 많은가. 열여덟도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이 없이는 부딪히고 깨지고 걸려 넘어지고 혼자서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스물여덟, 서른여덟, 마흔여덟의 우리가 그 애들을 일으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애들이 다시 일어나 길을 걷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여덟 살을 일으켜 달래줄 수 있다. 사회는 그렇게 순환해야 옳은 것이다. 

  여기까지 깨닫고 난 후에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직무를 유기했음을 절감했다. 나와 우리는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의 아이들을 그저 맨 몸으로 세상에 던져대고 있었다. 부동산, 주식, 펀드 … 밤마다 잠들기 전에 그런 것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읽어가며 공부하고 관련 정책에 목소리를 높여 토론하는 열성은 가졌지만 우리가 누리는 바로 그 똑같은 공간 속에서 열여덟, 이다지도 어린 아이들이 단지 부모와 가족이 없이 컸다는 이유로 방치되고 있는 것은 그저 넘길 수 있는 사회. 우리는 어느 면에서는 아주 뜨겁고 또 어느 면에서는 아주 차갑게 식어 있다. 

  사회의 시급하고 중요한 이슈라는 것은 그 순서를 어찌 정하게 되는 걸까. 목소리 큰 사람이, 더 힘 있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이해관계인이 더 많이 얽힌 의제가, 자본이 더 많이 걸린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할까? 만 열여덟이 되어 보육원에서 퇴소하는 아이들은 각자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해 국민청원도 하고 시위도 하고 노조를 결성해 활동을 하고 집단으로 뭉쳐 제도의 개선 방식을 주창할 수 있는 어른들과는 다르다.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거시적 관점의 일을 도모하기에는 턱없이 어리고 가진 힘도 자본도 몸과 마음의 여유도 없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처한 현실은 더더욱 수면 위로 올라오기 힘들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인도, 따뜻한 시선으로 이 문제를 다룬 방송이나 신문 매체들도 많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여전히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한

  열여덟에 보육원에서 아이를 퇴소시키는 일은 우리 사회의 일천함이다.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다. 보육원 다음의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18세에서 24세. 적어도 그 나이까지는 기다려주어야 한다. 둥지를 떠나 독립할 결심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제 삶을 위한 계획을 해나갈 수 있도록. 현 시대에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평균치만큼은 국가든 민간영역이 힘을 모으든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이 아이들도 그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세상에 그럴 자격이 없는 아이는 없다. 만 18세에 보육원을 퇴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육원에서의 청소년기와 작별하고 청년기의 시작을 꾸려나갈 수 있는 새로운 코-리빙(Co-living) 센터, 일명 청년독립센터를 마련해 입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입소가 아니라 입주라고 부르고 싶다. 거주시설이면서 동시에 배움의 공간도 되고 각자 사회에서 경험하고 돌아온 매일의 일들을 공유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의 형태를 갖출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가 도모해야 할, 이미 검토하고 실행에 옮겼어야 할 일이다. 청년센터 입주는 자발적 선택에 따르게 해야 하지만 누구나 원하면 입주 가능해야 한다. 거기서는 청년기의 삶을 위해 필요한 교육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보육원 퇴소 시기 문제를 다룬 기사들에서 아이들은 하나같이 신용 문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카드와 통장을 만드는 법, 보험을 드는 법, 빚을 지는 일의 위험성이나 제1, 제2 금융권의 구분 등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부분을 배우지 못해 퇴소 직후부터 위험에 처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센터에 입주한 이들은 나라의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더 많이 배우고 도움 받을 수 있다. 보육원 생활과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 관련한 제도 개선 등에 대해 누구보다 통찰이 많은 건 바로 이들일 것이다. 입주 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허심탄회한 정책 제안을 받는 문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만 18세가 되어 보육원을 퇴소하고 그 다음의 센터에 입주하는 이들에게는 보육원 관련 정책 제안을 받고, 같은 자리에서 이제 센터를 퇴소할 24세의 청년들에게는 그간 독립을 준비하며 지내왔던 센터의 제도 개선책을 묻는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보육원에도 그 다음의 독립 준비 기간 센터에도 꼭 필요한 제도 개선책을 그들과 함께 의논하고 토론하고 정책도 입안하며 그렇게 세상을 조금 더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곧 현장의 훌륭한 전문가이자 엄숙하고 단단한 생존자다. 

  센터로 이주한 18세에서 24세까지의 이들 중 원하는 이들에게는 일정한 급여를 받고 보육원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습, 놀이, 일상을 도울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어떨까. 봉사가 아니라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는 일자리다. 물론 생업으로 하기에는 모자랄 수 있고 평생의 직업으로 삼기에는 비전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일을 원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활을 가장 잘 아는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아 일상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면 보육원 아이들의 삶의 질, 학습 준비 정도, 마음의 온도가 모두 달라질 것은 물론이고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보육원 퇴소 청년들 역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동시에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결핍,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급학교 진학 준비, 이런저런 시험 준비 등과 함께 병행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여전히 아직 어린 나이에 안전망 없이 사회에 나가 거친 어른들 틈에 섞여 위험한 업무에 내던져지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안전하고. 일단은 생각이 나는 대로, 가능한대로, 하나씩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적어보았다. 단순히 영영 후원을 받고 누군가의 온정에 기대어 수동적인 존재로, 불안한 존재로 남아 있도록 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근거리에서부터 적으나마 공적인 일자리를 두어 자립의 실마리들을 계속해서 풀어내 주어야 한다.  

  이런 아이디어들을 싸그리 모아 가져다주면 빠릿하게 정부가 실행해줄까? 아마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지. 어느 한 지자체에서라도, 혹은 민간의 영역에서라도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단 한 곳의 청년독립센터라도 (실험적일지라도) 운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팀플하자고 우기고 싶은 많은 의제들 중에 제일 급하게 하고 싶은 걸 딱 하나만 고르라면 정말 어렵지만 이 일이어야 할 것 같다. 스케일도 제일(?) 크겠지만 이룰 수만 있다면 그보다 큰 기쁨이 있을까. 삶을 걸어볼 만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출생율이 0%에 가까워진대도 나는 별 감흥이 없다. 이미 태어나 힘겹게 생을 살아내고 있는 기특하고도 빛나는 아이들을 이리 홀대하면서 대체 누구의 탄생을 더 축복하고 싶다는 건가 싶어 의아하다. 이 사회에 생명 가진 모든 존재가 강함과 약함의 구분 없이 존중 받고 도움 받고 서로 연대하며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아마 그때가 되어서야 출생율 그래프는 겨우 반등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지원금 풀어봐야 소용없다. 그 지원금으로 퇴소하는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청년독립센터를 지어주는 게 오히려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출생율 올리기 정책에 기여할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옛 말씀에 이르기를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손을 보탠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가. 이 사회의 아이들에게 손 보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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