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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Jul 25. 2017

타인의 삶을 기록하기로 하다

예쁘고 고단한, 수많은 그대들

문득 정신이 들어 달력을 보니, 7월이 그냥 지나 있다. 4개월에서 5개월로 접어드는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하루 하루가 경이의 연속이다. 평화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고 또렷한 표정으로 말을 건넴으로써 나를 정신 차릴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평화와 함께 있을 때는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아이의 어떤 상태를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오지 않을 모든 과도기들. 내내 꼭 쥐고 있어 고린내가 나던 손바닥은 이제 무언가를 잡기 위해 펼치는 바람에 보드랍고 매끈하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겨우 한 달 정도나 맡을 수 있었던 그 고린내가 벌써 그립다. 이런 그리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아기를 재우고 난 밤은 침대에 벌렁 누워 뜨거운 발을 식히면서 남편과 도란도란 '오늘의 평화'를 리뷰한다. 예쁘고 고단한 나의 7월이 이렇게 지나고 있다.


아기와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꾸미고 마음과 몸을 단장했다. 임신을 확인했을 시점보다 지방은 줄고 근육이 늘어 몸이 가볍고, 여행에서 적당히 그을려 온 피부가 여름을 더 실감하게 해준다. 여행은 이랬다. 맑은 바다 속에 들어가 줄무늬 물고기들과 눈을 맞추고 징그럽다며 도망나오면서도 평화를 생각했다. 평화가 원하지 않을 때까지, 평화를 두고 우리 부부만 여행을 다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화가 혼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늘고, 그럴 땐 항상 놀이상대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독서량과 영화시청량은 현저하게 줄었다. 변명인지 몰라도 그 때문에 사색의 양과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도 줄어들었다. 동일한 에너지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하고 싶은 일을 적확하게 짚어내어 실행하는 곳에 소비한다. 꽤 효율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는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 재미있게 하기'(왜냐하면 돈이 안 들기 때문에). 이것을 누리는 데다 평화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2017년 여름은 나에게 벅찰 만큼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이란 한 사람을 차근차근 영상물로 담아내는 작업이다. <타인의 삶>이라는 미니다큐 프로젝트인데, 작년에 아무 이유 없이 나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찍고 편집했던 재즈 뮤지션 윤석철 편이 시작이 되어주었다. 임신과 출산을 치른 1년의 긴 공백기간을 지나 뮤지션 시리즈를 이어나가고 있다. 열심히 듣고 교류하던 전자음악 뮤지션 씨피카를 6월에 만났고, 몇 번을 만나 진지한 농담처럼 촬영을 했다. 씨피카와의 작업이 이제 막바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편집을 위해 프리뷰를 시작하고, 소스가 될 음악의 음향을 매만지는 단계. 그 다음으로 다룰 사람들의 첫 촬영을 시작했고, 다음다음으로 다룰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고맙게도, 사람들이 나를 믿어준다. 가볍게, 개인 프로젝트로 접근하는 것의 장점은 이것인가보다.


마지막 인터뷰를 준비하는 씨피카


마지막 인터뷰 중에 씨피카는 내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싶은거야?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기록자들이야. 네가 존경하는 뮤지션에 관한 짧은 영상, 너도 본다며. 그걸 만든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이야. 그 대답을 하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눈이 머무르는 사람이 있지 않냐고. 저 사람의 고민은 무엇일까, 인생에서 가장 집중하는 일은 무엇일까. 집까지 따라가보면 혹시 내가 처음 보는 술병 콜렉션이 있다든가, 재즈 엘피 천 장을 소유하고 있다든가, 종교를 창시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든가, 그러지는 않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은 늘 거기서 거기지만, 디테일한 데까지 들어가면 늘 흥미로운 것 아니겠냐고.


우리가 촬영을 위해 시공간을 나눌 때, 그녀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헛되며 (권지용님이 말씀하셨듯) 영원한 건 절대 없고 결국에 넌 변할 것이기 때문에, 당장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잘 해내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발언으로부터 내가 타인의 삶을 기록하는 이유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헛된 시공간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기록해두는 것이 당장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얻는다. 그것이 희열이든, 상념이든, 피로든, 조급함이든, 불안이든간에.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성장시킨다. 그 결과물은 조만간 유튜브에 업로드될 것이고, 과정의 조각들이 인스타그램(@livesofothersproduction​)에 전시된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내 인생의 패션(passion)이 될 것 같다. 물론 가장 성실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대상은 딸이다. 여느 아기 엄마처럼 나의 사진첩은 아기를 찍은 것이 95% 정도를 차지한다. 공연히 찍힌 사진이나 영상은 없다. 모든 상황은 어떤 이야기를 해준다. 오늘은 처음으로 치발기를 한 손으로 잡았어요, 오늘은 처음으로 소리를 꽥 질렀어요,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랐어요. 그러고 보면 매일이 과도기인 것은 아기뿐이 아닌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다음 날을 맞는 건 어른도 마찬가지니까.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삶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 수단으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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