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지방 출신이라 저평가 된 경험들이 알게 모르게 많지만 결혼시장에서도 이리 선명할 줄은... 오랜만에 만난 애인은 나의 정읍 한 달 살기를 지지해주었지만 의외의 반응은 그의 친구들에게서 나왔다. 그가 자주 소통하는 대학 동기들이 자신에게 집이 서울인 여자를 만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가가 부산인 아내를 둔 한 친구는 '나 지금 (먼) 처갓집 내려가는 중이다. 너만은 꼭 서울 여자와 결혼하길 바랐건만...' 하며 지방 출신 여자와 사귀고 있는 친구의 연애를 아쉬워해왔다는 것이다. 본가가 서울이 아닌 게 왜 안 좋은 거냐고 물었더니, 명절에 장시간 고속도로에서 보내야 하고 육아 도움도 못 받고 등등이라고 한다.
육아는 응당 장모님이 도와줘야 한다는 발상이 만든 이 무슨 신박한 '지방차별+성차별' 콤보인가 싶어 찬찬히 말을 곱씹어보았다. 의외로 내 주변에서도 이런 말을 종종 해왔단 걸 기억해냈다. 사회생활에서 만난 아주 친한 언니가 있다. 나보다 세 살 많고 집은 부산이다. 3년 전 결혼해 아이 하나를 낳았고 지금은 친정이 있는 부산에 남편과 함께 내려가 육아를 하고 있다. 언니에게 얼마전 나의 근황을 전하며 연애 중이라고 했더니 "남친 집은 서울이니"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잘됐다고 했다. 지역이 중요하냐고 물었더니 "애 낳고 키우려면 부모님이 가까운 데 사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하며 우리집이 정읍이니까 남친 집은 서울이거나 적어도 수도권이어야 맞벌이하며 아이 낳아 키울 수 있다는 거다. 언니 부부도 언니 집 부산, 형부 집이 충북이라 언니 손이 아니면 애 맡길 곳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직장 복귀도 막막하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게, 부부 모두 바쁜 직종에 종사하는 부부의 케이스를 알고 있다. 양쪽 모두 집이 수도권이 아니고 남편은 경남, 아내는 전남이었다. 어찌어찌 아이가 태어났는데 육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줄타기마냥 기댈 곳 없이 위태로웠다. 처음에 아내가 1년 육아휴직, 그 다음 남편이 1년 육아휴직해 2년을 키웠고 세살 된 아기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부부는 모두 회사에 다녀야했고 세살배기 아기를 어린이집 등하원 시킬 사람이 없었다. 끔찍히도 바쁜 회사는 정시 출퇴근도 아니었고 늘상 업무 전화를 받고 퇴근 다운 퇴근도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1년 육아휴직이 최선이었고 아예 관두지 않는 한 복직해 이 생활을 해내야만 했다. 결국 그 먼 거리에서 할머니, 외할머니가 번갈아가며 올라와 한 달씩 아이를 케어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배우자감으로 상대방 자체에 대한 호감 여부와 더불어 그 사람의 본가가 어딘지까지 따져봐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본가가 서울이란 것은 소개팅, 선 같은 결혼시장에서 꽤나 괜찮은 스펙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서울의 집값이 급등한 덕에 본가가 서울이란 것은 부모님 노후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히며 선시장의 좋은 스펙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육아 책임이 결국 엄마+장모에게 더 크게 지워지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결혼 상대의 본가가 서울인지 따져보기의 대상에 여성이 더 많이 놓이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 출신이 아닌 여자에 대한 비선호와 사회적 저평가가 내 마음을 쾅 하고 때린 지난 주말, 집으로 내려오는 KTX안에서 그동안 살면서 지방 출신 여자로서 당한 설움이 밀려왔다. 남아선호사상이 대단히 강했던 부모님은 굳이 여자애 서울로 대학 보내서 뭐하냐며 지방의 교대를 권하셨고 대학 진학부터 내 꿈은 좌절당할 뻔했다. 지방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지방에서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는 게 부모님과 그토록 갈등할 이유가 되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시장에서도, 육아까진 생각지 않는 20대 연애시장에서도, 지방 출신 여자라서 겪었던 저평가에 대한 기억들이 조각조각 퍼즐 맞춰지듯 머릿 속에서 선명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정읍중 운동장에서 만난 노력 강조 푯말..;; >.< 세상의 모든 어려움 극복을 개인의 책임에 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