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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서울 Oct 21. 2020

엄마호텔엔 냉장고가 다섯대

오늘은 비가 오려고 하는지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덕분에 아침 열시까지 엄마호텔 돌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질 못했다. 푹신한 꽃이불에서 한참을 밍기적거리다 나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플라스틱 대야에 발을 담그고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머리에 트리트먼트를 바르고 한동안 멍때렸다. 출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침 목욕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호텔 주인장인 마망이 멀리 충청도 언니네 집에 가신 덕에 오늘은 손수 조식을 챙겨먹었다. 오징어, 새우, 부추...총 열 한 가지 재료를 넣고 쌀부침가루로 반죽한 김치부침개다. 엄마는 반죽을 한 양푼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셨다. 나는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치기만 하면 된다. 이름하여 코리안 해물피자 브런치. 

한 끼 부침개에 장장 필요한 재료가 열 한 가지란 사실을 알고 서울에 가서 이걸 해먹을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자취방에선 최소한의 재료를 사놓고도 정말 필요한 딱 한 가지 재료가 없어서 요리를 망치곤 했으니. 어디 보자...오징어, 새우, 김치, 당근, 호박, 부추, 양파, 마늘, 계란, 감자, 카놀라유... 어제 반죽을 만든 엄마도 막판에 '정작 부침가루가 없다'며 당황하셨다. 집 앞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바로 사왔지만.



긴 모자티에 레깅스 한 벌 걸치고 내려온 터라 오늘은 입을 옷이 없다. 어젯밤에 내가 가진 모든 옷을 세탁해버렸다. 주섬주섬 옷장에서 엄마 옷 중에 제일 영해보이는 옷을 몸에 걸치고 급한 불을 껐다. 햇볕이 안나는 날씨 때문인지 아직 축축한 옷들이 건조대에 기약없이 걸려있다. 어젠 빨래를 하며 호텔 세탁기의 크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세탁기 용량이 무려 22kg였기 때문. 서울에서 6kg 세탁기 쓰는 나는 대략 난감. 일주일 입은 단벌 옷을 세탁할 수밖에 없는데 22kg 세탁기를 돌리기엔 너무 소량이었다. 에너지 낭비에 대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해야만 빨래가 가능했다.


엄마는 냉장고 부자이기도 하다. 엄마호텔엔 냉장고가 자그마치 다섯 대다. 일반 냉장고 두 대, 김치 냉장고 두 대, 냉동고 한 대. 요즘 말로 하면 엄마는 음식에 관한 한 맥시멀리스트이고, 다섯 대의 냉장고에 수많은 식재료를 수집하는 호더(hoarder)다. 부모님 두 분 사는 집에 냉장고가 다섯 대면 무슨 수로 그 안을 채우나 싶어 한 번씩 죄다 열어보았다. 웬만한 식당 뺨치는 버라이어티한 식재료들이 냉장부터 냉동까지 화려하게 존재감을 자랑했다. 요즘은 경남 남해에 사는 여자친구를 사귀는 남동생 덕분에 시시때때로 해산물까지 선물 온다. 


지난해 엄마가 수술을 하셨는데 아부지가 어무니한테 갖고 싶은게 무어냐고 하니 엄마가 냉장고라고 하셨나보다. 어릴 때 있던 집 냉장고가 작고 후지고 낡았었는데, 엄마는 그게 한이 되었나보다. 싱싱한 식재료를 수집하고 그걸 요리해 자식들 먹이는 게 우리 마망의 기쁨이다.


하루는 엄마랑 집 뒷동산에 산책인지 등산인지 하여튼 나들이를 갔는데 거기서도 엄마는 햇밤 한 주먹을 채집(?)해오셨다. ㅎㅎ 밤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밤송이를 발견하면 엄마는 가파른 산비탈을 해치고 내려가 따가운 가시옷을 벗겨내고 튼실한 알맹이를 쟁취하셨다. 그렇게 봄이면 냉이와 쑥, 여름이면 다슬기, 가을이면 밤... 엄마가 자연에서 채집하신 식재료들이 가득한 엄마호텔의 냉장고들. 정겹고도 소중하다. 그리고 남동생 여자친구가 보내온 갈치는 내가 다 먹어치웠다 ㅎㅎ 

엄마호텔의 어제 조식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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