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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껍데기

고요한 진공 속에서 밀려오는 은은한 파도 소리, 그 안에 담긴 너와 나

by 희야

일 년 중 하늘의 색이 가장 푸르를 때, 우리는 그 푸름에 사무치러 바다를 보러 갔어.

바다의 파랑은 너무도 선명했고, 우리는 멀찌막이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았어.

바다의 끝은 어디쯤 있을까. 그 끝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질문을 비웃는 듯, 수평선의 경계는 너무나도 흐릿했어.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느니, 차라리 발 아래 보이는 소라 껍데기를 주워보자. 하나 더 없나, 넓은 모래사장 안을 뒤적거려 보자. 우리가 함께 모진 세상 곳곳을 누볐던 것처럼.

저기 또 있네, 두 번째 소라 껍데기야. 우리는 두 눈을 꼭 감고 그것들을 하나씩 귓가에 가져다 댔어.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춰버렸어. 고요한 진공 속, 저 멀리서 밀려오는 듯한 은은한 파도 소리. 그 안에 잠긴 너와 나. 온 세상에 우리 둘뿐이었어. 그 순간만큼은.




들어봐! 진짜 파도 소리가 난다니까? 어때, 신기하지?!

그날,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었다. 마냥 모든 게 달기만 했던, 눈앞의 푸른 바다만이 눈에 들어오던 그때.

그날도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갔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휘-휘- 불어오는 가을바람, 그 바람을 가르고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 안에 몸을 실은 우리. 모든 게 완벽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눈앞이 온통 바다의 파랑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저기, 저 반짝이는 바다 좀 보라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함께 사유하고 싶어 했다.


그날, 나는 바닷가에서 딱딱한 소라 껍데기 하나를 주웠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모래밭을 파헤쳤다. 파고 또 파냈다. 소라 껍데기에서 들리는 잔잔한 파도 소리를 너와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좋았다. 너에게 이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넓은 세상을 겁 없이 뒤적거리는 용맹한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는 고운 모래알의 감촉이 전부 느껴졌다. 이런 촉감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일은, 어쩌면 네가 나에게 부린 마법의 힘일지도 몰모른다. 나는 마법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이제 내 손에는 두 개의 소라껍데기가 들려 있다. 하나는 나의 것, 또 하나는 너의 것. 우리는 그 소라 껍데기를 살며시 귓가에 가져다 댔고, 같은 파도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같은 소리를 들으며, 같은 걸 느끼고 있다. 나와 너의 행복은 제법 닮아 있었다.

끼룩끼룩 울어대는 수십 마리의 갈매기들, 모래를 실어 나르는 건조한 바닷바람에 말라가는 입안. 사막처럼 메마른 혀끝을 타고, 차갑고 달큰한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흘러 들어온다. 태어나서 맛 본 것 중 가장 달았던 그날의 아이스크림. 그렇게 우리는 파랑의 바다를 마음껏 만끽했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우리는 바다 사이를 가로질러 가고 있다.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어서, 우리가 디딘 적 없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게 했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하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했다. 소라 껍데기를 주워, 그 작은 구멍에 귀를 들이대고 같은 것을 들으려 애썼던 우리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바다는 너무도 푸르렀고, 그만큼 잔인했다.


나는 점점 깊은 곳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다. 고요하고, 그보다 더 잔잔한 곳으로. 기쁨, 슬픔, 분노,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이 무력해지는 곳으로.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커다란 기쁨을 느끼는 대신 거대한 고통도 뒤따라온다면, 나는 작은 기쁨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기쁨들은 다시 되돌려보내고 싶다. 감정의 파동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평화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큰 굴곡 없이, 잔잔히 흐르는 나날을 보내고 싶어졌다. 격렬히 헤엄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것이 나에게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점점 높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욱더 역동적인 파도가 몰아치는 곳. 기쁨, 슬픔, 분노,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해지는 곳으로. 거대한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더 큰 기쁨이 몰아치는 곳으로. 너는 감정의 파동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온한 흐름 속에 안주하기보다, 한껏 높이 떠오르며 뜨거운 순간들을 맞이하길 원하는 듯했다. 거센 파도를 타고 넓은 바다를 향해 더 멀리 헤엄쳐 가는 것, 너는 그런 일이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걸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소리를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낄 순 없는 걸까. 그때, 그 소라 껍데기 소리를 들으며 비슷한 행복을 공유했던 우리는 어디로 간 걸까.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바닷속을 표류하고 있다. 정말 바다에 끝이 존재하는 건지,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그런 의문을 비웃는 듯, 수평선의 경계는 여전히 뿌옇고 흐릿하다.



그날, 나는 소라 껍데기 두 개를 집에 가지고 왔다. 나의 것 하나, 너의 것 하나.

딱딱한 소라 껍데기가 부서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널찍한 어항 속에 고이 넣어 뒀다.

오랜만에 소라 껍데기 하나를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대본다. 고요한 진공 속, 저 멀리서 밀려오는 듯한 은은한 파도 소리. 소라 껍데기 안에 담긴 그때의 그 파도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들리고 있다. 바다 끝 경계선이 선명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철썩-거리고 있을 것이다. 파도 소리도, 그 안에 담긴 너와 나도.

만일 바다의 끝이 존재한다 해도, 현재의 우리는 계속해서 파랑의 바다를 만끽할 것이다. 그 속에서 함께 일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든 순간들은,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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