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빙산 속 진짜 이야기.
한 주를 보내고, 2회기 상담을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자녀 및 자기 수용 방해요소 이해하기'였다. 우선 이 두 가지를 구분해 적어 보았다.
1. 자녀의 모습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자녀 수용 방해요소)
: 잠깐도 기다리지 못하고 떼씀, 보채기, 행동(상황) 전환이 어려움. 길에서 드러눕기.
2. 자기의 모습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자기 수용 방해요소)
: 불안감이 높음. 계획이 틀어지면 화가 나는 편임.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예상외) 일에서 대해서도 짜증부터 남. 주로 자책, 비난 후에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함. 잘 해결한 후에는 짜증부터 냈던 자신에 대해 또다시 한심해하며 자기 비난을 반복함.
적어놓고 보니 아이의 모습은 생후 26개월이라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한창 그럴 때라 했고, 다른 엄마들도 모두 경험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모습은 정상적인 발달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문제는 자기 수용 부분이었다. 사실 내 경우엔 크게 보면 자녀와 자기 수용을 방해하는 요소가 같은 맥락이었다. 아이에게 기다리라 하거나 상황의 전환은 모두 내가 생각(계획) 한대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에 벗어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 높으니, 예민해지고 이것이 때론 화로 표출되는 것 같았다.
분노는 빙산의 일각이다.
기저에는 불안, 가장 아래에는 수치심이 있다.
상담선생님께서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이론의 마음의 지형학적 모델(빙산모델)을 설명해 주었다. 화는 우리의 의식의 영역에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전의식에는 불안(과거의 경험), 무의식에는 수치심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저 남보다 조금 더 예민한 편이라서, 아니면 체력이 달려서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위의 이야기에 진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천천히 나의 빙산 속의 사건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전 심리 상담 때의 기억과 어우러져,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첫째로는 학업과 관련한 것이다. 부모님의 다툼이 가장 극심했던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늘 중요한 선택을 준비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중3시절엔, 내 실력이면 외고에 진학할 수 있었단 것을 졸업식 날에야 알았다. (나와 성적을 앞다퉜던 아이들은 빠짐없이 외고로 진학했다.) 그렇게 계획과 도전도 못 해본 채 낙오된 상실감은 지금까지도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이후엔 전처럼 공부가 흥미롭지 않았다. 겨우 성적을 유지하며 맞은 고3시절, 담임 선생님은 유리한 내신점수로 수시를 지원할 것을 추천했다. 아버지는 원서비가 없다고 했다. 덧붙여 "너는 대체 그 시간에 공부를 해서 수능을 잘 볼 생각은 안 하고, 왜 그러냐?"라고 나를 비난하며 화를 냈다.
다음날, 내 사정을 딱히 여긴 선생님은 원서비를 빌려줄 테니, 대학 가서 갚으라고 하셨다. 나는 용기 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또 수시 얘기냐? 붙으면 학교 다닐 차비도 선생님이 주냐?", "너는 왜 하나만 생각하냐? 수능 못 보면 차라리 집 가까운 대학에 가!!"라 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좌절감, 수치심, 무력감, 이 일이 복선이 될 듯한 공포까지 모두를 느꼈던 탓일까? 20년이 다 돼가는 일임에도, 그때의 학교 복도 구석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이후엔 부서진 멘털 탓인지, 말이 씨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정말로 수능을 망쳤다. 그 수치스러움에 졸업식을 끝으로, 친구 2명을 제외한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둘째로는 금전적인 것이다. 집에서 받는 용돈은 학교 가는 날에 한해서 당일 차비와 점심값이 전부였다. 하지만 휴대폰 요금과 같은 생활비와 자기 계발을 위한 교육비도 필요했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었고, 월급은 예상한 날짜에 꼭 받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나 예상에 벗어나는 것은 단순 불편이 아닌 불안이자, 큰 위기였다.
셋째로는 성장 환경과 관련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물리적인 다툼은 예고 없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난데없이 화를 냈다. 그렇게 나는 늘 예상이나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들이 켜켜이 쌓여 뭐든 예상을 벗어나면 가장 먼저 공포를 느끼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다시 나를 마주해 보니 불안감이 높았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이를 양육하며 내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정리가 됐다.
더불어 내가 '자녀수용 방해요소'라 여겼던 아이의 모습은, 내가 자주 지적받았던 어릴 적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기 수용 방해요소'는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부모의 모습과도 같았다.
나의 무의식 속 수치심은
내가 부정했던 것들을 닮아서가 아닐까?
결국 나의 계획이나 아이의 행동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화부터 났던 이유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과 근원에 대한 무의식 속 수치심이, 분노와 비난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었을지? 그렇게 마지막 상담을 앞두고 해결법에 대한 질문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낀대의 아홉 번째 Solution.
1. 나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내 위치를 이해하기.
: 아이의 성장에 있어 가장 좋은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가 좋은 가정이고, 그다음은 부모가 이혼을 해서 각각 안정된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고 한다. 반면 가장 나쁜 가정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는 나쁜데 어쩔 수 없이 생활하는 가정이라고 한다. (도서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 저자 : 가토 다이조) 내 위치를 이해하니, 불안감이 높다는 이유로 또다시 불안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원래' 예민하고, 계획에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라며 쉽게 뭉뚱그렸던, 그 '원래'의 기원을 찾으면, 해결을 위한 진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타고난 기질인지, 처해진 환경이나 바탕이 된 경험들 때문인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2. 이미 일어난 상황에 대해 인정하기 : 그럴 수 있어~
: 상담 선생님께서는 "수치심의 경험은, 삶을 흔들 정도의 큰 무력감을 가져올 수도 있다."라고 했다. 때문에 경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혹시라도 건드려지면 "그래, 그럴 수 있어."라며 빠르게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남 탓, 거짓말(허언)이나 은폐, 합리화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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