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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뉴 Aug 29. 2023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나,  갓생러인가요?

새벽 기상이 자기만족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오전 내내 유난히 졸음이 몰려왔다. 커피를 솥으로 들이켜도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졸음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정신력으로 오전 업무를 버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는 동료에게 오늘 유독 피곤하다며 투정을 부렸다. "왜요, 잘 못 잤어요?" 걱정스러운 동료의 물음에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 나 요즘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잖아. 말 안 했나? 운동하려고..." 쓰읍, 한숨을 들이켠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언니, 완전 갓생러시네요!"


얼떨결에 갓생러가 되어버린 사연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높아진 것이었다. '이것도 해냈는데, 저것도 못해내겠어?' 하는 자신감. 실제로 나는 새벽 기상과 함께 부수적인 많은 자기 계발을 함께 시작했고, 자신감에 더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또한 많이 높아졌다. 매일매일 쓰는 습관일기, 나의 습관을 위한 생각과 행동 란에 나는 매일 '할 수 있다는 믿음, 잘하고 싶다는 의지, 스스로에 대한 신념..' 등 다분히 이음동의어적인 단어를 나열하곤 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갓생러'라는 말은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었다. 단어가 낯설었다는 말은 아니다. 한동안 '갓생 살기'가 마치 욜로의 대항마라도 되는 양 설쳤으니까. 욜로가 유행하던 시절 한번 사는 짧은 인생 누릴 것 누리자며 돈을 펑펑 쓰던 젊은이들에게 "그래.. 역시 잘 먹고 잘 사는 게 짱이지?" 하고 위로하는 듯이 나타난 단어 '갓생'은,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돈을 벌어서는 성공할 수 없으니, 아주 다양하고 신박한 방법으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듯했다. 시간을 쪼개 운동하고, 시간을 쪼개 스터디를 하며, 그 와중에 쪼갠 여가로 해외여행을 다니며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내 머릿속의 갓생러 이미지가 그러하단 뜻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나에게 '언니는 갓생러'라는 칭찬 기미를 띤 신조어를 붙여주었을 때, 나는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떤 의미로 4시 30분이라는 시각을 내 인생에서 쪼갠 것은 맞으니까.


자기만족러도 갓생러가 되나요?


"오빠, 땅을 파서 10원을 주워도 밖에서 벌어와야 돼. 집안에서 도는 천 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가끔 내가 포인트 적립이나 추가 할인 등을 깜빡해서 아쉬워할 때 남편이 "그 돈 내가 줄게." 하고 위로(?)를 건넬 때면, 내가 늘 하는 말이다. 10원을 벌어도 밖에서 벌어와야 한다. 내수는 의미가 없다. 하루 50원을 위해 만보기 어플을 켜고, 하루 10원을 위해 어플 출석 체크를 한다. 그렇게 나는 남편이 쥐어주려는 천 원을 마다하고 남에게서 100원을 기어코 얻어내곤 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갓생러의 의미가 있나? 내가 회사 동료의 칭찬 섞인 말에 머쓱해진 것도, 나의 기상은 모두 '내수용' 이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일어남으로써 생기는 부가적인 자신감(내가 해냄! 내가 뭐든 해낼 수 있음!)은 제외하고,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것은 고작 한 시간여의 운동이다. 그뿐인가? 그 운동조차도 그저 '러닝머신 걷기'라는 무언가 맥이 탁 풀리는듯한 유산소 운동일 뿐이다. 스킬이 필요한 운동도 아니고, 연습이 필요한 운동도 아닌 움직임에 불과한 무언가. 차라리 일어나서 조기 축구회를 한다던지, 배드민턴을 한다던지 그럴싸한 운동이었다면 좀 더 '갓생러'스러웠을 텐데. "무슨 운동해요?"라는 질문에 "응, 그냥 걷기..." 하고 조그맣게 말한 내가 후회스럽다.

내수용에 불과한 나의 '갓생'은, 굳이 한 단어로 말하자면 '자기만족'에 가깝다. 창출해 내는 무언가가 없으니까. 10원도 땅을 파서 얻어 내야 하는 작금의 시대에, 내가 동트기도 전에 이루어 내는 것이 과하게 소박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동료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기 위해 내가 밤 10시에 잠을 자기 시작했다고 말하자, "그럼 저녁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하고, 기상하기 위해 취침하는 삶! 구태여 새벽 기상을 결심하기 전에도 취침 시간이 11시를 넘긴 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료의 말에 문득 엇, 그런가? 하는 동조의식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역시 나는 갓생러보다는 그저 자기만족러에 불과하구나, 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상과 동시에 취침 시간을 기다리게 된 나, 문제 있다


하루의 기상 목표가 새벽 4시 30분이 되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 '새벽 4시 30분 기상하기'라는 초인적인 목표가 생기면서, 나의 온 정신력은 '새벽 기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일어나는 순간,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운동을 끝내고 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운동이 끝나고 난 뒤 나는, '내일도 4시 30분에 일어날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 한 스푼이 들어간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을 자는 순간까지도 계속된다. 아이들을 재우면서도,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도, 심지어 잠을 청할 때조차도 '나... 내일 일어날 수 있겠지?' 하고 걱정한다. 다음날, 또다시 제시간에 기상하면 안심한다. '내가 해냄!!' 그 후 같은 우려와 걱정의 반복, 또다시 해냄.

그렇다, 현재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나의 목표는 그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 시간에 일어나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있는 것도 많다. 기상 시간을 걱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일어나면서까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 4시 30분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기상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갖는 뿌듯함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한 마디, "저녁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하나의 정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샌가 나의 육퇴 후 시간이 자기 전의 최소한의 몸부림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피곤하지만, 어제 보던 프로 조금만 보고 자야지! 아... 지금이라도 잘 수 있는데! 하지만 지금 자면 오늘 저녁에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뭐라도 해야 해...!!


새벽 기상, 기상 시간 걱정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지속할 수 있다


아직까지 나는 '새벽 4시 30분 기상'이라는 목표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을 믿고 싶어 끊임없이 의심하고 걱정한다. '이 시간에 자고 내일 못 일어나면 어쩌지?' 또는 '회사에서 졸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을 여전히 안고 있다. '갓생러시네요'라는 말은 생각보다 아주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인생을 신처럼 귀하게 쓰고 있다는 말이니까. 그저 일어나기 위해 잠이 들지 않으려면, 그리고 그저 나의 '갓생'이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나는 오히려 더더욱 새벽 기상을 계속해야만 한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는 것은 즐겁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위해 아직은 내가 많은 정신력을 기상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 맞다. 새벽 운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한 내가 쉽게 이른 기상을 포기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오전의 상쾌함을 위해 오후의 느긋함을 자꾸 포기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꾸만 마음에 밟힌다면, 어딘가 고쳐나갈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갓생러인가요?' 아직까지는 '본인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 것이 대단해 미치겠는 자기 만족러'에 불과하지만, 분명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기상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새벽 기상의 장점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돌이켜볼 것이다. 진짜 갓생러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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