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관한 생각
우린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된다. 아침에 알람을 듣고 5분만 더 잘지, 오늘 점심은 뭘 먹을지 같은 사소한 선택부터, 이 회사의 주식을 지금 팔지, 미래를 위해 퇴사를 할지 등 각각의 상황에서 내린 결정들이 자신의 삶을 조금씩, 어쩔 땐 급격히 변화시킨다.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드는 생각,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고 그것이 올바른 건지 따져보는 건 매우 중요하다.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쓴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과 선택 이면에 있는 정신 체계와 그로 인해 생기는 인지 편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비합리성과 그에 따른 의사결정에 관한 오랜 연구를 이 책에 집대성하여,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사고 능력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가 소개하는 인지 체계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인간의 인지 능력과 비합리성을 잘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실험을 살펴보자.
영상에서 흰색 티셔츠를 입은 팀 3명과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팀 3명이 서로 공을 패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험 참가자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무시하고 흰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공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그 수를 세어야 한다(처음 보는 분은 한번 해보길 권한다).
사실 이 실험은 흰색 티셔츠를 입은 팀이 얼마나 공을 패스했는지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영상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천천히 등장해 카메라 정면을 보고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린 뒤 퇴장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실험 참가자의 50%가 고릴라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영상을 보면 이런 결과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릴라가 정말 확실하게 눈에 띈다. 실험 참가자 절반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간의 정신 체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의 정신 체계에는 빠르게 생각하는 '시스템 1'과 느리게 생각하는 '시스템 2'가 있다고 말한다. 시스템 1은 저절로 빠르게 동작하며, 노력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치 않고, 자발적 통제를 모른다. 보통 인상, 직관, 의도, 감정과 관련이 있다. 시스템 2는 복잡한 계산을 비롯해 노력이 필요한 정신활동에 주목한다. 흔히 주관적 행위, 선택, 집중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시스템 2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내리는 모든 판단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신중하게 선택을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대니얼 카너먼은 시스템 1이 인간의 정신 활동의 사실상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갈 인지할 때 먼저 시스템 1을 거쳐야 하며, 상황이 복잡해지면 그때 시스템 2가 임무를 넘겨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끔찍한 사진을 봤을 때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데, 이는 시스템 2가 아닌 시스템 1이 동작했다는 얘기다.
시스템 2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스템 2는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주의 집중과 기억을 조정해, 시스템 1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활동에는 시스템 2가 꼭 개입해야 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약속 장소에서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데 여자 친구의 머리 스타일이 단발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단발머리의 여성을 잘 알아보도록 정신을 조율해서 멀리서도 그녀를 찾아낼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회사에서 계약서를 작성한다던지, 방금 내가 했던 행동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지 생각해보는 것 같이 의식적으로 집중을 하게 되는 일들에는 시스템 2가 제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주변엔 흔히 자신의 멀티 태스킹 능력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대니얼 카너먼은 두 가지 이상의 일들을 동시에 하는 건 어렵거나 불가능하며 되도록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쉬운 일, 예를 들어 사람이 없는 텅 빈 도로에서 차를 몰면서 옆 사람과 얘기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는 끔찍한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개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처럼 사람이 한 가지 일에 고도로 집중하다 보면 평소라면 주목했을 자극(고릴라의 등장)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무언가를 보고 그쪽에 주목하는 것은 시스템 1이 즉흥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이지만, 이때 관련 자극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할당해야 하며 이는 시스템 2가 주관하는 일이며, 시스템 2는 멀티 태스킹이 안되는 녀석이다.
시스템 1과 시스템 2는 매우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린다. 이는 시스템 1이 제 몫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 1이 익숙하다고 정해놓은 상황은 예상과 반응이 대체적으로 빠르고 적절하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체계적 오류인 편향을 보이기 쉽다. 인상과 믿음의 차이, 그리고 시스템 1의 자율성을 알아보려면 다음 그림을 자세히 보라.
누구에게나 위의 직선이 아래의 직선보다 길게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그림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직선의 길이가 같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두 직선의 길이를 직접 쟀다면 시스템 2에 의해 길이가 똑같다는 사실을 '안다는 믿음'이 생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위의 직선이 더 '길어 보인다'는 것이다. 둘의 길이가 같다는 건 알겠지만, 시스템 1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같게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 1이 인간의 정신 체계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이며, 그로 인해 사람마다 각기 다른 편향된 인지 능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 체계를 담당하는 두 시스템의 능력과 한계를 알아봤다.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가 드는 생각들이 이런 시스템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더 좋은 의사결정을 위한 방법들을 잘 정리하여 일상이나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활용해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