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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Mar 12. 2024

사랑의 트라우마

귓바퀴에 앉아 상처 입히는 말

"지금 본모습 중에 지금이 제일 매력 없어."


늦은 밤. 소파에 앉은 남성이 바닥에 앉은 여성을 향해 건조한 눈빛으로 건네는 말. tvN 연애예능 환승연애 시즌3 중 한 출연자의 말이다. 여성 출연자는 풀 죽은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낙심했을 것이다. 낙심으로도 모자라 오른쪽 귓바퀴에 일평생 버티고 앉아 한 번씩 재생될지도 모른다. '매력 없어', '매력 없어.' 망령처럼 그녀를 따라다닐지 몰랐다.


그 장면을 보는 내 귓바퀴에도 앉은 말들이 많았다. 내 눈은 상대 남성 출연자의 눈빛을 매같이 포착했다. 본 적 있는 눈이었다. 어딘가 지친 것 같기도 하고, 단호하기도 한 눈. 그에 상응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특정할 수 없는 인물 몇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문장들이 생각났다. 그 문장들은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게 있다가 꼭 어떠한 순간이 되면 '있는 줄 몰랐지?' 놀리듯 떠오른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비워둔 옆자리에 그 문장들이 동승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 우산 밑으로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자주 가는 단골 카페의 오곡라테에 몇 스푼 섞여 있기도 하다.


"넌 상처받는 게 좋아?"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 문장. 이 말을 들은 당시에도 '웃기지도 않아'서 말로 상대를 거의 혼냈던 기억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왜 이렇게까지 해?'라는 저의가 나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그때의 나는 내 감정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는데. 


"거절하는 것도 되게 힘든 거야."

호프집에 마주 보고 앉은 내게 거품이 넘친 맥주처럼 찝찝하게 쏟아진 말. 몇 년 간 내게 물음표를 던진 마음이 있어 끝끝내 제대로 정리하고자 질문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네가 기억 못 한다고 몇 번씩 이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해. 그 말 끝에 붙은 말. 물론 죄는 내게 있었다. 중차대한 걸 물어놓고 기억을 못 하는 거. 그 덕에 이 말에도 수치심이 담겼다. 그리고 죄책감. 상대를 피곤하고 힘들게 했다는 미안함. 사실상 화를 내면서 얘기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 말들은 꼬리표처럼 나한테 딱 달라붙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저 사람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밥 한 번 먹자고 해볼까?', '내가 거절로 넘겨짚은 것 아닐까?' 헷갈릴 때, 원래의 나였다면 한 번 더 물어봤을 것들에 제동을 건다. 


일종의 트라우마지만, 어쩌면 교훈일 수도 있을까?

또 한 번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매달려 온 건 한 명 한 명, 그 상대들이 아니라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이 그림자의 실체가 당신일까 봐, 그런데 내 잘못으로 사랑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했다는 걸.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내가 진짜 사랑한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였고, 매달린 건 사랑에 대한 '가능성'이었다는 걸. 그러니 기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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