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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타호텔 Nov 23. 2023

선운사에서, 선운사

그대를 잊는 것도 순간이었음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선운사의 대웅전은 보수공사 중이었다.

선운사가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공사 중이라니...

그러나 모두가 좋다한들 별로인 날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좋다한들 별로인 것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운사의 아름다움이 어디 대웅전뿐이겠는가.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여름을 사랑한다.
여름이 가득한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운사는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로 더 알려져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이 시를 읽은 후부터 줄곧 선운사에 가고 싶었다.

선운사에 가면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도 순간일 것만 같아서.

선운사에 가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폭염의 날씨에 선운사에 간 나는 선운사를 떠올리면 이제 그대가 아니라 이 무더위를 기억할 것이다.

고창에 위치한 선운사는 가는 건 한참이지만 둘러보는 건 금방이다.

사실 모든 절이 그렇다. 법당에서 108배를 하지 않는 이상 절을 다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절은 아무리 오래 걸려서 갔더라도 절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겨우 몇 분 남짓 보기 위해 간 것이라 해도 절에 온 것은 항상 잘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한동안 절에 가면 소원은 '마음이 지옥에 있지 않게 해 주세요'였는데 요새는 바뀌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게 해 주세요'
어쩌면 두 문장은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더 이상의 치열함이 지친다. 많이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지쳐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는 치열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생각했다면 이젠 다르다.
치열하지 않은 삶도 의미가 있다.
오히려 흘러가는 대로 살 수 있는 게 가장 큰 복인지도 모르겠다.

그대를 잊기 위해 가고 싶었던 선운사에서 그대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을 잊는다는 건 꽃이 지는 것처럼 찰나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우리는 꽤 자주 그립다고 착각하고, 힘들다고 착각하고, 괴롭다고 착각한다.
절에 가면 하나도 그립지 않다. 힘들지 않다. 괴롭지 않다.

그래서 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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