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랑말랑 Nov 26. 2019

왜 자꾸 내가 커피잔을 정리하지?

오랜만에 주영이 전화가 왔다. 내일 오전에 병원에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 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큰 병에 걸렸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평일 오전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친구는 흔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나에게 부탁을 할까 싶었다. 나는 다른 약속을 미루고 병원에 같이 가 주기로 했다.



10시 예정이었던 검사는 예약보다 빨리 진행됐다. 검사가 너무 빨리 끝나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애매해졌다. 병원 1층에 있는 카페에 들렸다.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섰다. 우리 차례가 되자 주영이가 한걸음 앞으로 나가며 먼저 주문했다. 그러고선 가방을 달랑달랑 흔들며 자리로 가버렸다. 뭐야? 지금 나보고 계산하라는 건가? 주영이가 또또또 이런다. 자기 볼일을 보러 왔으면서 커피 한 잔 사려 하지 않는다.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서면서 나는 주영이를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했다. 주영이는 자기 가방을 팔에 걸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딱 넣었다. 자신은 커피잔을 정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커피잔을 정리하고 쟁반을 들자 출입구 쪽으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그러고선 여봐라 어서 문을 열어라 하는 표정으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손은 여전히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채.


주영이를 엄청 좋아하는 남자라면 웃음 한번 보겠다고 모든 것을 받아 주면서 사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애정을 쏟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왜 커피를 사주고 커피잔을 치우는 서비스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문까지 열라고? 주영이는 지금 아프잖아.라고 이해를 하기에는 그동안 주영이가 너무 괘씸했다. 주영이는 백화점 들어갈 때도 문을 손으로 한번 잡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 탕 하고 머리에 맞도록 문을 놔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처음에 둘이 친해지는 단계에서는 주영이가 매번 이런다는 것을 잘 몰랐다. 주영이는 너무 자연스러웠고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계속 커피잔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계속 거슬렸다. 내가 하면서도 내가 왜 또 내가 커피잔을 정리하고 있지 하면서 스스로 한심해졌다. 커피잔 정리하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만날 때마다 곤두서 있는지. 주영이도 밉고 나도 미웠다. 하지만 주영이를 만날 때는 단순히 커피잔 정리가 아니라 호구가 되는 것 같아서 정말정말 하기 싫었다.


관계에 있어서 계산적인 사람이 되고 나면 아무도 모르는 싸움을 혼자 하게 된다. 한두 번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던 일도 셈이 누적되면서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관계에서 재고 따지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누가 한번 더 전화하고, 누가 한번 더 약속을 깨고, 누가 식당에서 숟가락을 놓고, 누가 커피잔을 한번 더 정리하는지,,, 애정과 관심들까지 계산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만남 자체가 피곤해진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을 때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시간 쓰고 마음 쓰면서 친구를 미워하고 나를 한심해하고 있었다. 돈을 손해 보는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다. 나는 주영이를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다. 검진 결과는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다.



저 사람 너무 싫어.

저 사람 진짜 짜증 나네.

저 사람 정말 밉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따뜻한 마음을 모아주는

좋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이전 11화 의지와 시간을 쌓아 이뤄낸 일이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