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오정희 선생님의 장편소설 ‘새’ 필사를 끝냈다. 400자 원고지 40매씩 5묶음, 약 8만 자를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는 프로젝트였다. 꼬박 1년이 걸렸다. 필사 완료!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반응이 뜨겁다. 와아~ 어떻게 책 한 권을 끝까지 옮겨 쓰냐. 나는 매번 앞에 10페이지 정도만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했는데. 친구들은 끈기가 대단하다며 엄지척 좋아요를 올렸다.
이제 고백한다. 내 끈기는 이틀짜리다. 나도 몇 번이고 필사를 시작했다가 시작점에서만 도돌이표를 찍다 포기하곤 했다. 한 달짜리 계획표를 짜 놓고 사흘에 한 번씩 수정만 하다가 구석에 버려뒀다. 수학 문제집은 맨 앞에 있는 집합 부분만 까맸다. 이런 내가 이번에는 어떻게 장편소설 필사를 끝낼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기특하고 신기했다. 내가 써 놓은 원고지 묶음들을 겹쳐 놓고 후루룩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필사를 하는 시간 속에 숨어 있던 끈기에 대한 비밀 하나를 알게 됐다.
짧은 끈기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을 끝내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하다가 멈춘 일을 다시 시작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선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러니까 필사를 하다가 10장 쓰고 멈췄으면 다음에 필사를 시작할 때는 11페이지부터 이어 써야 한다. 한 달이 지나든 두 달이 지나든 멈춰 선 데서 이어서 계속 가는 거다. 여러 번 시작한 거, 10장씩 쓴 거, 20번을 반복했으면 그게 쌓여 200페이지가 되고 한 권이 된다.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이 단순한 원칙이 내 짧은 끈기로는 도저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길고 긴 일을 끝까지 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동안 이상한 완벽주의가 있었다. 부실한 끈기의 흔적이 내 결과물에 남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이어 붙인 흔적이 없는 완벽한 완성을 꿈꾸다 보니 허술한 완성조차 한 번도 이뤄내지 못했다. 필사가 나에게 남겨준 건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끈기가 아니라 끝까지 달려보는 경험이었다. 매일 시작만 몇 번씩 반복하다 포기하던 나에게 필요한 건, 한번 시작한 일을 한꺼번에 끝까지 밀어붙이는 끈기를 키우는 게 아니라 멈춰 선 중간 지점에서 시작해서 이어갈 줄 아는 것이었다. 그렇게 멈춰서는 나를 인정하고 쉬어 걸었던 흔적이 결과물에 남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다면 이틀짜리 끈기로도 한 달의 노력이 쌓여야 하는 일을 이뤄낼 수 있다.
책 한 권을 필사하는데 일 년이 걸렸다는 말. 이걸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내가 필사를 시작하고 끝낸 기간은 1년이지만 실제 필사에 집중한 시간을 보면 8만 자를 옮겨 적는데 30시간 정도가 걸린다. 성실하고 끈기가 대단한 사람이 하루에 한 시간씩 꾸준히 한다면 한 달이면 끝낼 일을 두고 나는 일 년 동안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꾸준히 걷는다는 것은
쉬지 않고 한꺼번에 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고 엎어지고 끊어지면서도
내 페이스로 꿋꿋하게 이어 붙여
마지막 마침표에 가 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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