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제가 계속 말해온 것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와인을 알고 싶다면, 왕도는 없다. 공부는 나중에 하고, 그냥 꾸준히 먹어보는게 최고다. 와인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와인이 뭔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분명히 있으실 것이고, 그런 분들을 위한 팁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최단시간 레벨 업을 추구하는 전투적인(?) 민족이니까요.
잠깐 저의 옛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와인을 알게 된 것은 27살 때 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년정도 쉬면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동기 녀석 J가 삼청동에 있는 어느 와인바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제가 좋아할 게 분명하다면서요. 그 가게는 삼청동 메인 도로 중간쯤에 4층건물의 3층에 있었습니다. 긴 직사각형의 공간에, 도로 쪽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었고, 10자리 정도 되는 짙은 고동색의 바가 길게 놓여진 가게였습니다. 가게 중앙 천장에는 모던한 디자인의 커다란 샹들리에 느낌의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바 뒤쪽으로는 500여장의 CD와 앰프, 스피커, 와인잔들이 놓여있었습니다. 조용한 재즈가 흐르고, 살짝 담배냄새가 느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술집에서 흡연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게에 서 있던 직원이 너무나 낯이 익었습니다.
“어? 선배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
“왜긴! 내가 사장이니까!”
당황스럽게도, 사장님의 정체는 고등학교 때 서클 선배님 이었습니다. 물론 절 데리고 갔던 친구는 매우 황당해 했었죠. 그 뒤로 이따금씩 놀러가서 와인을 마셨는데, 하루는 사장님이 저에게 알바를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마침 딱히 일이 없었던 저는, 회사에 취직할 때까지 일하기로 하였습니다. 약3~4개월 정도 알바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 때 알바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제가 과연 와인바를 운영하고 있을까 싶습니다.
뜬금없이 옛날에 알바 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사장님이 저에게 시킨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그 때 사장님은 저에게 이런 지시를 했습니다.
“매일매일, 가게에서 파는 하우스 와인을 한 잔 씩 마셔라.”
그 당시에 가게에서 팔고 있던 하우스 와인은 산지오베제 라는 이탈리아 토착 품종으로 만든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인이었습니다. 유명한 품종의 와인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저는, 그냥 시키는대로 매일매일 한 잔 씩 마셨습니다. 거의 3개월 동안을요. 그렇게 꾸준히 한 가지 와인을 매일매일 마셨더니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경험이 쌓여서, 기준이 생겼습니다.”
기준은 중요합니다. 어떤 맛을 느꼈을 때 ‘맛있다’ 혹은 ‘다르다’라고 느끼려면,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한가지 와인을 마신 덕분에 저는 한가지 와인에 대한 분명한 기억(기준)이 생겼고, 그 뒤로 저는 다른 와인을 맛보게 되면 매일 마셨던 그 와인의 맛을 기준으로 여러 요소(향, 맛, 입에서의 감촉 등)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그동안 먹어본 것에 비해 신맛이 강하구나, 이건 단맛이 강하구나, 이건 탄닌감이 약하구나 같은 식으로요.
이런 이유로 해서, 빠른 레벨 업을 위한 제가 드릴 수 있는 팁은 다음과 같습니다.
“똑같은 한 가지 와인을 매일매일 한잔 씩, 최소 한달 정도 마셔본다.”
비싼 와인일 필요가 전혀 없고, 국가도 상관없고, 품종도 상관없습니다. 적당히 입맛에 맞는 저렴한 녀석으로 집에 쌓아놓고 하루에 한잔씩 드셔보세요. 남은 와인은 그냥 코르크로 막아서 시원한 곳에 보관해도, 2-3일은 그럭저럭 마실 만 하니 보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시구요. 혹시 와인 맛이 변하는 것이 신경 쓰인다면, "와인진공펌프"를 하나 장만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검색해 보시면 금방 찾을 수 있고, 가격도 많이 비싸지는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와인은 머리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와인 책을 하나 더 사는 것 보다, 와인 한 병 더 사서 마셔보는 것이 와인에 좀 더 친숙해 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