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이 나에게 남긴 것은
복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1년이 아닌 6개월이라서 그런지 더욱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마음이 싱숭생숭 하기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환경 변화가 나를 빠르게 뒤쫓는 기분이다. 어렵사리 얻은 육아휴직의 기회였는데 너무 훅 하고 지나가버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1호가 되어 회사를 시끌벅적 하게 만들고 떠나온 육아휴직의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남겼는가? 기억의 되새김질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육아휴직을 하기 전 나에게 육아는 회사 일보다 쉬운 것이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아내의 일과는 내가 경험했던 퇴근 후와 주말의 일과로 비추어 회사일 보다는 쉬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보다는 내가 육아를 하는 것이 더 가족을 위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 매일 반복되는 전업 주부의 일상에 한 대 쳐 맞아 보니 정신이 혼미 해졌다. 잠깐 잠깐 틈나는 대로 해오던 육아는 그저 상대를 떠 보기 위한 잽에 불과 했다.
아침과 저녁 시간이 제일 힘들었 던 것 같다. 한 쉬도 가만히 있지 않는 두 망아지들을 위해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눈 비비며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만들었다. 가뜩이나 밥맛이 없는 아침인데 메뉴를 고르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때로는 씻기고 옷을 입히고 때로는 스스로 씻고 옷을 입는 것을 가르쳤다. 한 놈을 씻기면 다른 놈이 사고를 쳤고 한 놈을 옷입히면 다른 한 놈은 입힌 옷을 다시 벗고 있었다. 등원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을 붙잡으며 입밖으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육두문자를 반만 나오게 하느라 윗니로 아래 입술을 꽉 깨물고는 했다. 하지만 실제 등원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망아지에서 거북이가 되어 버려 나머지 육두문자 대신 킹콩의 괴성으로 아이들을 채찍질했다. 그래도 올망졸망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이 너무 작고 귀여워 이내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과 머리 속이 가득 찼다. 겨우 아침 일과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겨우 1라운드 뛰었는데 흰 수건을 던져야 하나 했다.
그래도 유치원 버스에 타기 전 매일 하는 큰 아이와의 포옹과 버스가 떠나기 직전 서로 보내는 머리 하트가 기억에 남는다. 포옹은 내가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버스 타기 전 큰 아이가 갑자기 와락 안겼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보답으로 버스가 떠 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아이가 앉은 방향을 향해 머리 하트를 해 주었다. 큰 아이도 덩달아 머리 하트를 했던 것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큰 아이를 버스에 태워 보내면 작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어린이집까지 등원 시켰다. 자가용은 아내가 출퇴근하는데 써서 작은아이와 나는 도보로 등원 했다. 눈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영하 14도의 한파가 몰려 와도 꿋꿋하게 우리 둘은 한 걸음 한 걸음 어린이집을 향해 나아갔다.
오전이 바쁨과 빡침 그리고 감동의 쳇바퀴였다면 오후는 단절과 고립 외로움이 있었다. 마치 수도승이 된 것처럼 말없이 그리고 묵묵히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했다. 남성 전업주부는 동네 맘 크루에 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단절과 고립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우울증이 왔다. 우울증은 쉼없이 달려오기만 하다 지쳐버린 나의 내면과 마주하게 해 주었다. 지금은 육아 우울증이던 육아휴직 전 바쁜 일상에 가려진 나의 지친 내면이던 크게 나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다. 마음 속에 작은 방을 만들어 잘 돌보고 있다. 그런데 곧 복직이라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반가움 반 부담 반과 함께 저녁 전쟁이 시작된다. 작은 아이는 항상 큰 아이를 괴롭혔다. 무려 4살 차이가 나는데도 형의 것을 빼앗기 일 수였다. 저녁식사를 할 때도 같은 메뉴일지라도 이상하게 형의 식판을 호심탐탐 노렸다. 빼앗긴 형은 비명을 지르며 분노를 발산했다. 아직 큰 아이는 감정 조절이 어려운가 보다. 한 녀석을 달래고 한 녀석은 혼내다 보면 저녁식사는 엉망이 되었고 내 멘탈은 안드로메다로 외출을 해버렸다.
내 육아휴직과 맞물려 자아가 생성되어 버린 작은 아이는 모든 지 반대로 하는 고집 센 청개구리가 되었다. 밥먹자 안먹어 씻자 안씻어 기저귀 갈자 안갈어. 그 무엇 하나 쉽게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어 나를 질리게 했다. 7년 동안의 육아 경험 상 이러한 상황에 특별한 해결책은 없다. 시간이 지나 어서 분별 있는 아이로 빨리 자라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말이다. 아니 한가지 만병통치약은 있다. 잡스가 만들고 떠난 악마의 유혹, 스마트폰. 하지만 한번 쓰기 시작하면 떼기는 배로 어렵고 쓰고 나서 이내 몰려오는 죄책감은 더 견디기 힘들 다는 것을 큰 아이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더 이상 스마트폰 요법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어찌어찌 먹이고 어찌어찌 씻기고 나면 아내가 밤 늦게 퇴근을 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된 하루 스트레스를 수다로 깨부수고 싶었지만 아내와의 면회시간은 너무 짧았다. 아내는 아이 둘을 데리고 수면 감옥으로 다시 떠나 다음날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면 나는 스마트폰으로 유투브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다 잠을 잤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인생을 길게 보면 이번 육아휴직을 통해 얻은 커다란 소득은 다시 시작한 읽기와 쓰기였다. 읽기는 큰 아이 탄생 이후 손 놓았었고 쓰기는 이번 육아휴직 동안 수강했던 강좌를 통해 입문하게 되었다. 단절과 고립, 외로움 속에서 그나마 읽기와 쓰기라는 친구들 덕분에 시련의 시간을 잘 해쳐 나올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는 성취감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고 나를 나 답게 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쓰기와 읽기를 통해 육아와 고통 속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육아휴직 6개월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매일 가족을 위해 지긋 지긋 하게 만들었던 삼시세끼, 큰아이와의 포옹과 머리 하트, 폭설과 폭우 그리고 한파를 뚫고 겨우 겨우 갔던 작은 아이와의 어린이집 등원 길, 아침 전쟁, 저녁 전쟁, 아내와의 면회, 고립과 단절, 외로움, 우울증, 그리고 읽기와 쓰기, 작은 아이와 함께 했던 달콤한 초컬릿 같은 낮잠, 내가 손수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본 그 나날들, 동사무소 작은 도서관 강좌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 독감 걸린 두 아이들을 등에 없고 마을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던 일,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큰 아이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던 나날들, 그리고 더 잘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등등. 이 추억들을 등에 단단히 짊어 지고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