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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책은 없고, 인생 독자는 있다

<백번 읽어도 새로운 책>

by 무명치의

연애란 수학책에서 집합 단원을 공부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과 연애를 한 사람은 여러 가지 수학책의 집합 단원만을 공부한 것이다.

집합을 깊이 파고들면 교집합, 합집합, 여집합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심지어 집합 박사가 될 수 있듯이, 연애를 많이 하면 연애 박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수학은 집합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함수, 미분, 적분, 확률, 통계까지 수많은 챕터가 이어진다.

연애는 그 시작에 불과하고, 결혼은 완전히 새로운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연애를 많이 한다고 해서 결혼을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집합에만 능숙하다고 해서, 곧바로 함수나 미적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은 책 하나를 골라 그것을 평생 수십, 수백 번 읽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같은 책을 그렇게 오래 읽을 수 있는지 의문일 수 있다.

하지만 수학의 정석 같은 책을 떠올려 보자.

열 번째 보더라도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다섯 번째 풀었을 때와 열 번째 풀었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문제, 같은 풀이 과정이라도, 머리와 가슴이 받아들이는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결혼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같은 책을 억지로 반복해서 읽는 지겨움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복 속에서 매번 새로운 의미와 감정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제와 똑같이 저녁 식탁에 앉고 비슷한 대화를 하지만,

그 안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찾아내는 사람만이 오래도록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헤어짐은 무엇일까.

헤어짐은 결국 이해되지 않는 문제의 고통 때문에 책을 덮어버리는 순간이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다가, 이 책은 나와 맞지 않는다며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수학책을 집어 들면, 다시 같은 단원에서 막혀 같은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책은 바뀌어도 푸는 사람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전에는 풀지 못했던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건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상처였던 말이, 오늘은 별일 아닌 농담처럼 흘려보낼 수 있다.

결국 삶과 인간관계는 나의 성장 속도와 경험의 누적에 따라 다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잘못이 전혀 없는 이별이 있을 수 있다.

그건 파본을 산 것과 같다.

책의 챕터 몇 개가 아예 빠져 있거나, 부록에 쓸모없는 것이 끼어 있는 경우다.

아무리 정성껏 문제를 풀어보려 해도 풀 문제가 없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결국 책을 버릴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깨닫게 된다.

관계에는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운도 중요하고, 책 자체의 질도 중요하다.

나 스스로 책을 고르는 안목 또한 필요하다.




결혼은 단순히 사랑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건, 성격, 가치관, 환경, 운'

이 모든 요소가 결혼 생활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같은 책을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읽을 마음이 있는가?'

결혼은 바로 이 지속성의 문제다.

연애는 신간을 집어 들 때의 설렘으로 유지되지만,

결혼은 이미 손때 묻은 책을 수십 년간 곁에 두고 매일 다시 읽어내는 일이다.

같은 문장을 만나더라도 매번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결혼은 시간이 흐르면서 책의 내용이 스스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가족이 늘어나면 새로운 장이 열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예상치 못한 부록이 붙는다.

그 부록은 때로는 난해한 문제를 던지고, 예상치 못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부록 덕분에 책은 더욱 풍성해진다.

처음에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였던 책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와 자식, 또 다른 가족들까지 합류해 함께 쓰는 공동 저작물이 된다.

결혼은 혼자 읽는 책이 아니라, 함께 읽고 써 내려가는 책이다

결국 결혼이라는 책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 같은 완벽한 책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완벽한 책은 없다.

결혼 생활을 오래 이어가는 사람은 운명적인 책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책을 끝까지 읽으며 그 속에서 계속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 사람이다.

결혼은 서로의 결점 때문에 책장을 덮는 대신

서로의 결점을 껴안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써 내려가는 일이다.


연애는 집합에 불과하다.

결혼은 그다음의 함수, 미적분, 통계, 확률로 이어지는 방대한 학문이다.

연애를 통해 사랑을 시작하고, 결혼을 통해 비로소 그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결혼이란 책은 억지로 버티며 읽는 것이 아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다 읽지 못할 계속 새로워지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과정이다.








치과에서 우리들끼리 (치과의사, 직원, 가끔 환자분께) 쓰는 말 11


발치 관련 2

1. 루트 피커, 루트 포셉 준비해 주세요.

- 치아가 부러져서 뿌리만 따로 뽑겠다는 뜻이다.

2. 블레이드랑 페리오스틸 엘리베이터 준비해 주세요.

- 잇몸을 잘라서 열어젖히겠다는 뜻이다.

3. 서지컬 버 준비해 주세요.

- 뿌리 주위에 있는 뼈를 쳐내면서, 뿌리를 빼겠다는 뜻이다.


머리 없이 뿌리만 있는 상태의 치아는 잡고 뺄 게 없어서, 발치 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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