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흔적으로 살아가는 하루
2024.12.17 (화) 맑음
정숙 씨,
날씨가 부쩍 추워졌어요.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
딸은 출근 준비를 서두릅니다.
오늘도 5시 반에 집을 나섰다네요.
의정부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하는 길이 예전보다
많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판교까지 왕복 6시간을 오갔던 딸이었는데,
회사를 옮긴 지금은 통근버스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당신도 딸이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는 소식에 기뻐했을 거예요.
아들은 어제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오후 2시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잠깐 쉰 뒤에 저녁 7시쯤 학원으로 향했죠.
바쁜 아이를 보면 든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돼요.
당신이 있었다면 “건강도 챙겨가며 해라, 무리하지 말고”라며
따뜻한 한마디를 건넸겠죠.
저는 오늘 걷기 운동을 핑계 삼아 고읍동에 있는 삼성서비스센터를 다녀왔습니다.
당신이 침대에 누워 즐겨 보던 태블릿의 소리가 작게 나와서요.
이제는 제가 당신의 태블릿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고쳐보려 나섰습니다.
집에서 서비스센터까지 걸어가니 약 50분 걸렸습니다.
추운 날씨에 패딩을 단단히 껴입고 나섰는데,
걷다 보니 몸이 금세 따뜻해지더군요.
땀이 맺힐 정도였어요.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건
당신 생각 때문이었겠죠.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 길도 훨씬 짧게 느껴졌을 텐데."
서비스센터에서는 태블릿을 점검해 보더니 스피커를 교체해야 한다고 했어요.
두 개를 갈아야 하는데 8만 원이나 든다니,
비용이 부담스러워 그냥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소리가 아예 안 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 태블릿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를 따라 미소 짓던 당신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거든요.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이라곤 온통 김치 종류뿐이더군요.
그래서 오이무침과 계란말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당신에게 해주려고 사다 놓았던 돼지껍질로 요리를 해봤어요.
당신이 얼마나 좋아했던 음식인지 잘 알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니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습니다.
왜 진작 당신이 있을 때 만들어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소박한 음식에도 눈빛을 반짝이며 기뻐했었잖아요.
그렇게 몇 가지 반찬을 만들고는 김치찌개를 끓였습니다.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먹으려고요.
밤 9시가 다 되기 전에 딸이 퇴근하며 치킨을 주문했다고 하더군요.
아들도 학원 수업을 마치고 9시 반쯤 집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김치찌개와 배달된 치킨을 함께 나눠 먹었어요.
하지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당신의 빈자리는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없는 이 집안 풍경은 여전히 낯설고 쓸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식탁에서 당신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한마디가 없으니
공허함이 가득 차는 기분이에요.
정숙 씨, 당신이 떠난 후에도 저는 당신이 남긴 온기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당신의 태블릿,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
그리고 당신이 남긴 추억들로 이 겨울을 채워가고 있어요.
언제나 제 곁에 있던 당신의 흔적을 느끼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당신이 그리워지는 마음도 커져갑니다.
이 편지를 통해 제 그리움을 전하며,
당신의 온기가 닿아 있던 모든 순간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늘 당신을 사랑했던,
당신의 남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