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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병원의 하얀 시간들

고통과 사랑이 나란히 걷던 날들

by 시니어더크


2012년 7월 17일, 제헌절이었다. 나라의 근본을 세운 헌법이 공포된 날이지만, 세상은 그 의미를 잊은 듯 분주히 흘러가고 있었다. 공휴일이 아니게 된 지 오래라 병원은 여느 때처럼 문을 열었고, 복도에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퍼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한여름의 빛이 유리창을 두드렸고, 바닥에는 환자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눅눅했지만, 그 안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날 새벽, 그녀는 다소 힘겨운 숨을 고르며 일어났다. 새벽 다섯 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고, 머리를 빗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휠체어를 꺼내 그녀의 옷자락을 곱게 정리했다. 그 옷자락 끝에는 하루를 견디기 위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고, 바깥 풍경은 물속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차창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여름 하늘처럼 고요하면서도 아프게 아름다웠다.


병원에 도착하자, 언제나처럼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복도의 공기는 차가웠고, 채혈실의 금속 의자는 낯설 만큼 단단했다. 얇은 피가 채혈관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끝을 더 꼭 쥐었다. 엑스레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 안에서 들려오는 기계의 짧은 숨,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 병원은 늘 희망과 체념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내 옆에서 조용히 손을 쥐었다. 그 손의 떨림 속에는 하루를 견뎌야 하는 의지와 두려움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의사는 짧게 말했다. "아직 혈액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감염에 조심하세요." 그 말 한 줄이 하늘의 무게처럼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온기만을 붙잡았다.


진료를 마치고 신장내과로 향했다. 교수는 감기약을 더 처방하며 신장 수치가 높다고 했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묵묵히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병원에서는 모든 대화가 짧았다. 불안도, 안도도, 감사의 말조차 길게 이어질 틈이 없었다.


병원을 나서려는데 현관 쪽에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자동문이 열리며 들어온 공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순간, 머리칼 사이로 엿보인 눈빛이 내 마음을 멈춰 세웠다. 삶의 끝과 끝을 건너온 이가 잠시 머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고통도 두려움도 씻겨 나간 듯, 오직 평온만이 깃든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알았다. 오늘도 그녀는 견디고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또다시 하루를 배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보낸 열 시간은 길고도 무거웠다. 기다림의 시간은 말없는 형벌처럼 흐르고,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희망이 한데 엉켜 있었다. 누군가는 초조하게 번호표를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눈을 감은 채 오래된 기도를 되뇌었다. 그 고요 속에는 각자의 절박함이 스며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의 공기는 약하게 틀어둔 에어컨 바람에도 차가웠다. 그녀는 두 팔을 모은 채 몸을 웅크렸다. 창밖으로 흐릿한 저녁빛이 번졌고,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은 다 같이 밥 먹을까요?" 그녀의 한마디는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오랜 침묵을 녹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는 하루의 고단함을 함께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 식탁에 모였다. 샤부샤부 냄비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고깃국물 냄새가 집 안을 감쌌다. 그녀는 조심스레 고기를 건져 상추에 싸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나는 잠시 손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김이 오르는 냄비 속으로 저녁 햇살이 비치고, 그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고요히 번졌다. 그 순간 나는 병원 복도의 냄새도, 의사의 말도, 하루의 그림자도 모두 잊었다. 웃음은 그렇게 짧지만 기적 같은 것이었다. 너무 짧아서 아쉬웠고, 너무 따뜻해서 오래 남았다.


밤이 깊자 그녀는 진통제를 꺼냈다. 하얀 알약 아홉 개가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물과 함께 삼켜질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잠들 때까지 나는 불을 끄지 못했다. 그 숨결이 고르게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일, 그것이 내게는 하나의 기도였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열은 다행히 내렸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아팠다. 밤새 기침으로 목이 부었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병원에 같이 가요."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미소로 대답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함께였다.


집 앞 의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받은 뒤, 마트에 들렀다. 장을 마치고 나오니 빗줄기가 굵어졌다. 그녀는 처마 밑에서 무거운 짐을 옆에 두고 서 있었다. 나는 급히 차를 몰아와 문 앞에 세우고, 그녀를 태우며 짐을 실었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져 차체를 두드렸다. 그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젖은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렸고,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보여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불판 위 고기가 익어가며 내는 소리가 오랜만에 집안을 채웠다. 상추에 고기를 싸서 한입 넣은 그녀의 얼굴에 오랜 기억처럼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그녀가 알려준 대로 김치를 담갔다. 절인 배추 여섯 포기, 미나리, 마늘, 젓갈, 고춧가루. 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손짓으로 말했다. "고춧가루는 너무 많이 넣지 말아요. 젓갈은 조금만." 그 목소리는 여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밤이 깊자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진통제와 조혈제 주사를 맞고 침대에 누웠다. 창밖의 매미 울음이 여름의 심장처럼 뜨겁게 울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잦아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가 되었지만, 익숙해졌다는 말은 덜 아프다는 뜻이 아니었다.


며칠 뒤, 그녀의 혈액 수치는 다시 흔들렸다. 나는 숫자 대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입술이 희미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신장 수치가 오르자 투석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스쳤고, 나는 그날 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제발, 이번만은 넘어가게 해 주세요." 오직 그녀의 숨결만이 희미한 리듬으로 어둠을 버티고 있었다.


며칠 후, 앞산에 안개가 내렸다. 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나는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개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위로 같았다. 그녀의 손등 위로 햇살이 떨어지며 조용히 흔들렸다. 그 떨림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 있음'의 의미를 느꼈다.


"바람 좀 쐬고 와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차를 몰아 포천 쪽으로 향했다. 계곡에 이르자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아쉬움도, 희망도, 그리움도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당신이 조금만 회복되면, 우리도 저 물가에 앉아 고기를 굽고, 그렇게 다시 여름을 맞이합시다.' 그 다짐은 약속이라기보다 기도에 가까웠다.


그날 저녁, 아파트 창밖의 노을이 벽을 스치고 지나가자 어둠이 거실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진통제를 삼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탁기의 소리가 밤을 채우고, 엘리베이터의 '띵' 소리와 함께 딸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아빠, 엄마 다녀왔어요." 그 한마디가 하루의 끝을 덮는 이불처럼 따뜻했다.


세탁기의 마지막 회전이 멎자, 집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희미하게 벽을 스쳤고, 나는 그 빛 속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버텼습니다. 제발 내일은 조금만 덜 아프게 해 주세요." 그 기도가 공기 속으로 스며들며 아파트의 밤은 더 깊어졌다.


암이라는 긴 터널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잃지 않았다. 낮이면 그녀의 희미한 숨결에 귀를 기울였고, 밤이면 그 숨소리를 지키며 잠들었다. 하루하루가 두려움의 반복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았다. 작은 웃음 하나, 미약한 숨 한 줄기, 따뜻한 손끝의 온기 속에 아직 희망은 살아 있었다.


나는 날마다 기도하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내일보다 모레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기를. 그것은 기도이자 약속이었고, 우리가 함께 남은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끝에는 분명 빛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나는 오늘도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삶이란 어쩌면 완전한 희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끝없이 버텨내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걸어온 길 위에는 기적보다 인내가 더 많이 남아 있었고, 그 인내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절망의 끝에서도 손을 놓지 않고 버텨내던 그 힘,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는 하루를 견디며 사랑했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일,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믿음을 배웠다. 그것은 다짐이자 기도였고,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 믿음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녀의 손을 잡으면, 그 미세한 온기가 내 손끝으로 번져와 생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병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빛을 만들었다. 세상이 잿빛으로 흐려져도, 그녀가 조용히 미소 지을 때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고통이 멎은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기도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내일보다 모레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기를. 그렇게 매일을 버텨내며 우리는 사랑했고, 그 사랑은 희망이 다한 자리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믿음이었고, 인간이 살아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형태의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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