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에게도 배울 점은 있더라.
국민연금에서 편지가 왔다. 국민연금에 가입되어있던 기간 중 사업주에서 내지 않은 몇 달간의 금액이 얼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미납되어있다.. 뭐 그런 내용의 편지. 아, 맞다! 나 못 받은 월급이 있었지!! 게다가 못 받은 몇 달치의 월급보다 그 이전부터 국민연금은 미납됐었네?
지금으로부터 무려 9년 전, 일전에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하며 알게 되었던 팀장님에게 새롭게 시작하는 회사의 멤버가 되자는 제안을 받았다. 말이 멤버지, 직원 채용, 스카우트 비슷한 그런 거였다. 그때도 나는 다소 느슨한 회사생활에 무료함을 느낄 즈음이었다. 디자인 회사. 믿을 수 있는 팀장님(그때만 해도 그랬다). 약속되어있다던 큰 협력업체. 강남 한복판에 2층이나 되는 규모의 사무실 자리.
아.. 개업식 때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개업식 행사(?)를 위한 회사 소개서를 간단히 만드는 과정에서, 그때 말했던 ‘약속되어있다던 큰 협력업체’가 갑자기 빠지는 걸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때 발을 뺐어야 했는데! 20대 중후반 무렵 풋풋했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 (멍청했던 건가.)
당연히 그 회사는 1년이 채 못돼서 망해버렸고, 그 당시 얼마 하지도 않은 내 몇 달치 월급은 고스란히 증발해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노동부에 신고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고서야 알아채는 바람에 억울할 대로 억울했던 나는 거금 10만 원을 들여가며 소송장을 접수했다. 지급명령은 떨어졌지만, 망해서 어렵다, 순차대로 갚으려고 계획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등등 해대며 결국 밀린 월급은 주지 않았다. 끝장을 보려면 민사 소송까지 가야 했지만, 그 과정까지 오는 동안 이제는 그러기도 싫을 만큼 더 이상 엮이기 싫어졌다. 어휴, 징글징글해.
사기꾼. 그러니까 피땀 흘린 내 월급을 떼먹은 그 사장이 왜 생각났냐면, 정산까지 끝난 작업 데이터 정리를 하다가. 사실 내가 지금 데이터를 정리하는 방법은 바로 그때 그 사장이 알려준 정리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만 생각하면 잊고 있는 억울함이 다시금 올라오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가장 중요한 데이터 정리법을 배웠다. ‘디자이너에게 데이터 정리는 필수!’라며 본인만의 정리법을 알려준 게 벌써 9년 전 이야기. 덕분에 그 이후 다른 회사를 다니고, 또 회사를 나오며 몇 번의 인수인계를 하는 경우에도 기가 막히게 정리를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나왔다.(나가는 마당에ㅋ)
데이터 정리가 필수인 시대를 살고 있으니 디자이너에 국한된 말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번의 시안 작업과 리서치를 하는 동안 모았던 자료, 아이디어 스케치 등이 가득한 파일들은 나중에 또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기에 중요하다. 이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이후로 9년째 사용하고 있으니까. 지금 나의 데이터 정리법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작업이 끝난 프로젝트의 폴더명을 열면, 3개의 폴더로 나뉜다.
(모든 데이터는 시간순 정리가 당연하다는 전제 하에)
00 완료. work
01 진행. work
02 자료. data
00 완료. work : 말 그대로 작업이 끝난 최종 데이터가 모이는 폴더. 작업 원본을 포함하여 최종 인쇄용 파일들이 들어있는 폴더다. 완료 후 포트폴리오용으로 만든 목업도 같이 넣어놓는다. 최종 데이터 전달까지 마무리 짓는 프로젝트의 경우, 목업을 제외한 폴더만 압축해서 보내기 수월하다.
01 진행. work : 해당 작업을 위해 진행했던 작업 즉, 시안으로 작업했던 데이터들이 모이는 곳이다. 최종적으로 선택되진 못했지만 버릴 수 없는, B컷들이 저장되는 곳. 영혼이 갈린 작업물들이 고이 저장되는 곳이다. 언제 어떻게, 다른 방면으로 사용될지 모르는 작업물들이 있는 곳.
02 자료. data :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모았던 리서치 자료들, 사용한 소스들, 아이디어 스케치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그때 이 프로젝트에 썼던 그 이미지가 어디 있더라..’하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이 폴더로 찾아오면 된다.
그 외에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 늘어난 폴더가 있는데, 그건 바로 ‘03 견적. data’ 폴더. 내가 견적을 제안하는 경우는 사실 그리 많지 않지만, 간혹 견적을 제안하거나 계약서를 주고받거나 할 때 폴더를 만들어 따로 저장해둔다.
다른 직업군이거나, 규모가 큰 회사를 운영한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 정리하는 게 더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시각적인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에겐 프로젝트별로 파일을 정리하는 게 유용하지 싶다. 적어도 나처럼 혼자서 일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에겐 말이다. 2020년도 상반기 폴더에 쌓인 00개의 프로젝트명 폴더들을 보면, 그래도 상반기를 열심히 산 것 같아서 꽤나 뿌듯하다.
비록 내 몇 달치 월급을 생각하면, 고가의 배움이 아니었나 싶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사기꾼에게도 배울 점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