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매일 고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안정적이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다양한 일들을 해볼 수 있어서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이지만 마냥 도전만 하며 살기에는 현실에 부딪히고 마는 게 어쩔 수 없는 인생이다.
고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의 경우를 크게 살펴보면 가능한 일정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적절한 금액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뉜다. 일정은 불가항력이 아닌 경우라면 어떻게든 맞추게 된다. 안되면 잠을 줄이는 방법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 아직까지는 지금껏 부딪혀서 하지 못한 건 없었다. 일에 있어서는 되도록 한계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웬만한 기회는 잡을 수 있으면 다 잡아보려는 욕심이 있다.
돈, 돈, 돈. 그놈의 돈이 뭐라고.
문제는 마지막이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많은 스트레스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건 금액이다.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금액과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금액에는 차이가 있다.(대부분 적다) 디자인이라는 게 마치 수학 문제 풀듯이 계산해서 수치대로 나오는 일이라면 달라질까? 창의적인 일을 금액으로 책정하는 일이 애초에 어려운 일이라 그런 걸까?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일(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도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 그러다 보니 당연히 좋아하는 일을 취미처럼 '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낮게 책정된 금액 앞에 누군가 ‘그걸 따질 처지인가’ 라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라고 강요한다면야 모를까, 일단 선택지 앞에 놓인 이상 고민은 깊어진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로 인해 낮아지는 자존감' 때문이다. 소위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낮은 금액’은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정말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마치 이 정도 급 밖에 안 되는 실력 없는 디자이너가 된 기분. 그러다 보면 끝내 자존감이 하락하고 만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별 것 아닐 수 있는 일인데, 이미 나는 나대로 내 상황 안에서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한 번 자존감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내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디자인만 찾아보며 스스로를 끝없이 아래로 끌어내린다. 다시 올라오기까지가 너무 힘들다.
그렇게 되면 일을 못 한다. 할 수가 없다. 금액이 적어서 자존감이 낮아질 걸 뻔히 알면서 억지로 했다가는 아이디어고 뭐고 없다. 디자인이 안 나오니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는 당연히 낮아질 수밖에. 만족도가 낮은 디자이너에게 클라이언트는 다음에 연락을 할까? 안 한다. 악순환이다. 서로에게 안 좋은 결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확신을 갖고 결정해야만 한다. 이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디자이너에게 포트폴리오는 자신을 증명하는 결과물이자 증표다. 디자이너의 자존감 문제를 건드리는 단계(낮은 금액) 앞에서 ‘이 일이 나에게 포트폴리오가 될 만한 일인지’를 물어보는 건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것과 같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생각했던 금액보다 작아서 한번 더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거기서 한번 더 동기부여를 해보는 거다.
비록 이번 일을 해서 얼마 안 되는 수익을 얻더라도 스스로에게 무언가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고 또 하나의 멋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볼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면, 앞서 했던 고민은 말끔히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프로답게. 나는 디자이너니까.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거다.
하지만 포트폴리오가 될 만 한지를 생각해봤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령 규격과 제약이 많아 디자인을 하는 데 여러 제한이 있어서 포트폴리오에 싣기도 어렵다는 판단이 들 때다. 여기서 내가 한번 더 생각해보는 건 또 다른 동기부여다. 포트폴리오는 어렵지만,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하다못해 위시리스트를 채울 수 있다던지, 아니면 클라이언트와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함이라던지 하는 것들이다.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디자이너의 감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행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게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른 문제다) 여러 가지 배제되는 상황 속에서 최대한 해볼 수 있는 걸 해보는 것도 디자이너로서의 능력이지만, 분명 이런 일들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 때다. 지금껏 겪어온 바 그런 판단이 들 때는 애초에 클라이언트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것 같은 약간의 확신이 드는 경우다. 이런 경우, 대부분 클라이언트는 일을 순서 없이 진행해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상황을 만들거나 아니면 디자이너를 단순히 오퍼레이터로만 생각한다. 어느 정도 일을 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프리랜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알 수 있다. 왠지 모를 이상한 낌새, 느낌적인 느낌 그런 것.
이럴 땐 시작하기 전에 거절하는 게 맞다. 서로를 위해. 대신, 거절은 정중하게. 지금의 클라이언트가 미래의 클라이언트 일지 아닐지 알 수 없듯이, 지금은 거절이지만 미래에 또 어떻게 내게 기회로 다가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클라이언트에게서 또 다른 클라이언트를 소개받고 그 소개가 또 다른 소개로 이어지는 걸 경험해본 바, 그래야 하더라.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이제 막 독립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자존감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손에 잡히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누군가가 혹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의 경우를 보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디자이너로서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아주는 데에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주기를.
꼭 인플루언서만이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나의 자리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나도 분명히 누군가에게(어딘가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꼭 나처럼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긴 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느라 자존감을 챙길 여유조차 없는,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힘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