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인 5년 차 디자이너의 영업 철칙
영업은 어렵다. 디자이너에겐 더욱 어렵고, 소극적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렵다. MBTI 검사에도 극강의 ‘I’가 나오는 나에겐.. 너무 어려운 숙제와 같은 것. 회사생활을 끝내버리고 프리랜서를 선언했을 때, 옆에 있던 남편은 당연히 응원해주었지만 한편으론 걱정했다. 이렇게 소극적이어서 일을 가져올 수 있겠냐며. 걱정은 사실 늘 진행 중이다. 아마 프리랜서 생활 내내 따라다닐 걱정 중 하나.
나의 프리랜서 생활은 일단 모든 지인을 총동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주로 나보단 남편을 통해서 일을 가져왔다. 나보다 산 날도 많고, 경험이 많으니 당연히 지인도 나보다 훨씬 많을 터. 지인을 통해서 일을 따온다는 게.. 자칫 애매한 경우가 생길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많은 일이긴 하지만, 뭐.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없었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이상, 어쨌든 돈은 벌어야 하니까.
하지만 한동안 지인을 통해 소개받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아 나는 능력이 없어서, 지인을 통해서가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지인이니까 일을 연결해주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에게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겠구나. 마치 능력은 없지만 ‘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지못해 일을 주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디자이너로서의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별것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나는 지인을 통해서 일을 가져오고, 그 일이 잘 마무리되면 그 지인을 통해 또 다른 지인을 소개받는 형태로 지금껏 일했다.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는 지금도 이런 식이다. 나와 연결된 클라이언트들은 90%가 전부 이런 관계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소개받은 또 다른 사람. 소위 말하는 지인 찬스가 어디까지 가겠나 싶지만, 돌이켜보니 의외로 이것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더라.
가만히 있는다고 일이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다.
영업하지 않으면, 나를 알릴 기회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럼 나는 영업을 안 한 걸까?
자신이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 상품을 판매해서 수익을 내는 경우와 경쟁 pt를 통한 입찰 등의 방식은 사업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제외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이 일을 가져오는 방식(영업)은 아주 크게,
1) 나처럼 지인 혹은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
2) 각종 sns 홍보를 통해서
3) 재능마켓 등 디자이너 소싱 플랫폼을 통해서
가 있다.
물론 이 세 가지를 다 잘하면 좋겠지만, 나처럼 다소 소극적인 성향의 프리랜서 디자이너라면 한 가지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짜 영업하는 사람들, 디자이너들이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것 또한 나만의 영업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나도 제법 노하우가 생기고 있는 느낌.
위의 세 가지 중 내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방법은 바로 1번이다. 지인으로 시작하지만, 지인에서 더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한다면 이 또한 무궁무진하다. 개인적으로는 sns나 디자이너 소싱 플랫폼처럼 전혀 관계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 관계를 통해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는 편이 나에겐 훨씬 유리하다. 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나만의 철칙(?)이 있다.
1. 일정과 약속은 중요.
뻔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중요하다. 특히 내가 주로 하고 있는 인쇄물 쪽 일은 대부분 마지막 단계에 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는 대부분 급하다. 급하게 연락해 작업이 가능한지를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땐 정말 불가능할 것 같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그 일을 가져온다. 손이 빠른 편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일정을 못 맞춘 적은 없다.
어떠한 프로젝트를 내가 주도하지 않는 이상, 프로젝트를 이끄는 사람들에게 일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정도 맞춰주게 되면, 클라이언트에겐 꽤나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기억에 많이 남는지, 나중에 또 다른 일감으로 나에게 연락이 온다.
2. 시작했으면 즐겁게.
비용에 대한 이야기다. 프리랜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포트폴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디자인 비용을 직접 제시하는 일은 없었다. 제시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미 클라이언트는 생각해놓거나 잡아둔 예산이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 의뢰를 한다. 프리랜서 초창기엔 이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적은 금액인데, 이렇게 할 일인가? 돈도 얼마 주지 않으면서 요구하는 건 왜 이렇게 많아.’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일이 술술 풀릴 리가.
근데 애초에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길 거였으면, 이 일을 받아선 안된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작업 비용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다. 그래서 ‘저렴한데 빠르고 고퀄리티’라는 카피를 내걸며 홍보하는 디자이너 소싱 플랫폼을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시작하기로 했으면, 또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생긴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한다.
3. 고집은 의미 없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클라이언트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 괴롭다. 디자이너가 생각하기에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면, 그때는 디자이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인 내가 더 잘 알지 클라이언트가 뭘 알겠냐.. 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수백 개의 폰트 중에서 당연히 디자인 시안에 맞춰 선택한 폰트로 시안을 만들어 보내면 다른 폰트를 보여달라고 한다. 열에 여덟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바꿔달라고 한다. 의뢰를 받는 입장에서 이유 없는 피드백은 불편하다. 그렇다고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 나도 수정하지 않겠다’하는 고집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홧김에 가지고 있는 수백 개의 폰트를 다 적용해 보여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찾아내면 다행이지만, 막연히 결정권자가 그렇게 결정했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방법이 없다. 의뢰를 한 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프리랜서 생활을 5년 정도 해보니, 위와 같은 철칙 아닌 철칙이 생겼다. 초창기엔 매일같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며 일하는 방법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 세 가지 모두 평범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나처럼 지인을 통해 일감을 찾아나가는 생계형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겐 이 세 가지가 탄탄히 밑받침이 되어줘야 또 다른 일이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초창기에 나를 힘들게 했던 클라이언트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소개해줘서 지금껏 연결이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방법이 아주 틀리진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