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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이 Dec 05. 2023

트라우마, 이제 이별할 수 있을까


물성이 있는 제품들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기 앞서 중간 점검 단계를 거친다. 책도,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본 인쇄에 들어가기 전, 내가 원하는 컬러와 유사하게 인쇄되었는지 또는 옅은 색이 종이에 안 묻어 나온 것은 아닌지, 잘리거나 넘치는 것은 없는지 등 인쇄를 맡긴 업체에 가서 중간 점검을 하게 된다. (대형 출판사 중에는 자체 인쇄실이 있어 자회사 내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기도 하지만, 제작물량을 자체적으로 모두 감당하기 어렵거나 인쇄실을 두고 있지 않은 작은 회사들은 대부분 거래하는 인쇄소를 따로 둔다.) 이를 보통 ‘감리'라고 부른다. 


한 가지 컬러, 특히 먹색으로만 인쇄를 하는 경우는 감리를 보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책을 제작할 땐 표지만 감리를 보고 왔다. 지금까지 만든 다이어리가 총 12개, 그중 종이 다이어리가 6 종류, 절판된 것까지 합치면 8권의 다이어리를 제작했다. 초반에 제작한 2권을 제외하고는 계속 거래처를 바꾸게 됐다. 처음엔 원가를 절감하면서도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이후에는 원하지 않았던 사고들이 발생하는 바람에 새로운 업체를 찾게 됐다. 


분명 미팅할 때까지는 ‘이곳이라면 괜찮겠다!’ 생각했는데 정작 일을 하는 과정은 상상과 달랐다. 업체 선정을 하는 과정에서 놓친 게 있는 걸까, 우리가 유독 까다롭게 요구한 걸까. ‘염려 말라'는 업체의 자신 있는 말과 다른 제작상태를 마주하고 보면 당연한 기대가 아니었던 걸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일들을 단순한 입장차이였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매번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 생각하며 심사숙고해서 선정한 업체들이었는데... 제작하는 과정에서 인쇄사고가 거듭 발생하는 바람에 재인쇄를 하게 된 일, 그래서 제품이 도착하면 하루든 이틀이든 밤을 새 가면서 표지와 내지를 꼼꼼히 넘겨가며 파본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도 계속 다이어리 제작을 하는 게 맞는 건가' ‘다른 업체들은 파본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할까' ‘다른 업체들도 늘 이렇게 인쇄사고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는 걸까' 등등의 많은 물음표를 던졌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진짜 트라우마가 올 것 같았다. 






작년 하반기에는 PDF버전의 다이어리를 만드느라, 또 올해는 책을 출판하는데 집중하느라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제작하게 됐다. 책을 만들었던 업체에서 견적을 받고 제작까지 진행하려고 했는데 하필 모든 인쇄실이 바빠진 시즌이라 감리를 볼 수 있는 일정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고, 심지어 감리를 보게 되면 원하는 납기일에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민이 됐지만 납기일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감리를 보지 못하더라도 제작을 맡기고 싶다고 했고, 거래처 인쇄실 담당자를 통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감리를 볼 수 있게 하겠다. 보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할렐루야!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감리 일정이 잡혔고, 심지어 표지와 내지 모두 같은 날 확인할 수 있게 일정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표지는 원하는 느낌이 그대로 구현되었다. 심지어 탁한 정도까지 잘 맞아서 별다른 요청을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내지가 문제였다. ‘이거 이거 신경 써주세요' ‘어디 부분 확인하고 싶어요' ‘데일리 일정을 기록하는 부분은 라인이 연한데 꼭 나와야 해요' 염려되는 마음만큼 실장님 옆에서 계속 요청에 요청을 거듭했다. 걱정 말라며 충분히 다 살펴보고 가라고 하셔서 정말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살펴봤고 처음으로 사고 없는 인쇄 감리를 경험하고 왔다. 나오면서도 ‘페이지 순서가 섞이면 안 돼요, 선생님.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려요'라고 또 부탁에 부탁을 거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부분을 특히 더 신경 쓰고 걱정하는지 알려드리는 거였으니까.


사고 없이 끝난 감리, 너무 벅찰 정도로 좋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이다. 표지에 코팅을 입히고 제본까지 된 다이어리들이 사무실에 도착해서 실물로 보게 되는 그날을. 부디, 별 탈 없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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