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애월에서 너와 나의 이야기
거시기.
모처럼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문득 창가의 따듯한 햇살이 나의 팔랑귀 안으로 쏙 들어오더니 여행 바람을 불어넣는 거야.
그때 내면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내가 많이 힘든 상태였거든.
생각해 보니 제주도 당일치기가 확 끌리는 거야.
첫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나오면 문제 될 게 없겠더라고.
말하자면 어떻게든 너에게 가고 싶었나 봐.
공항으로 마중 나온 너의 냄새를 잊을 수가 없어.
넌 참 행복해 보이더라.
그날 우리 참 오랜만이었지.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바닷바람을 마시며 주변의 풍광을 담고 있던 그때였어.
반가움 뒤에 언뜻언뜻 내게서 시무룩한 표정이 보인다고 말하던 너.
혹시 무슨 일 있었니.
뭐 별일은 아니고 요즘 답답증이 많아졌어.
답답증이 많다는 거는 고민거리가 많다는 거 아냐.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걱정거리를 미리 당겨오던 습관 때문인 거 같아.
한때 나도 그랬어.
의미 없는 시간만 축냈었지.
지금은 괜찮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어떻게 극복한 거야.
닥치지 않은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할 거라고, 나한테 세뇌하듯 말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믿으려고 노력했어.
조건에 따른 감사 말고 무조건 감사하기로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조급했던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
실은 나도 산다는 게 별 거 아니란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비교하던 습성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었나 돌아봤어.
분명 상대방과 나는 만족의 기준이 다를 텐데 보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던 거 같아.
아닌 척해도 그게 나였을 거야.
더는 안 하고 싶어.
비교의식 따위.
그날, 바다가 보인 애월 카페를 지나 한담 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다짐했어.
타인에게 보일 삶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계절마다 사고 싶은 백화점 원피스는 사이즈 더 늘기 전에 사 입겠다고.
노후 계산 하느라 명품 반지 인상된 가격 탓하지 말고 손가락마디가 더 굵어지기 전에 껴 보겠다고.
가족 구성원 뒷바라지 하느라 국내든 해외든 여행 기회 놓치지 않겠다고.
예고 없이 무너질 수 있는 몸 상태에 관심 갖고 아껴주며 미리미리 체크하겠다고 약속했어.
후회하기 전에 나의 삶에 내가 중심이 되어야겠더라고.
더는 눈치 보지 말고 사고 싶을 때 사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을 때 떠나는 거 말이야.
그리고 언제든 머물고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말 거짓말 아니야.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늦은 밤 집으로 가는데 가로등 밑에 있던 흰 라일락 향기가 너에게로 보내는 거 같아.
거시기.
새 봄이 오면 다시 갈게.
코코크러쉬 반지 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