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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리형 Sep 09. 2019

너의 집 가는 길

기억과 존재의 상관관계

 너의 집 가는 길은 숨이 헐떡이도록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왼편으로는 담쟁이넝쿨이 온 담장을 뒤덮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은행나무가 빈틈없이 늘어선 그런 언덕길이었다. 처음 너를 데리러 가기 위해 그 길을 오르던 날 세차게 맥박 치는 두근거림이 가파른 언덕길 때문인지, 가득한 설렘 때문인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단 하루도 설레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너의 집 앞에서 너를 기다릴 때 높다란 아파트 사이로 나를 비추던 햇살의 따스함이 참 좋았다. 그날의 태양이라고 특별히 더 따스했을 리 없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날 우리가 했던 일들, 나눴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순간의 느낌만은 왜 더 선명한 건지...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에도, 너의 손을 잡고 걷다 보면 평지를 걸을 때처럼 가볍게 오를 수 있었다. 육체의 감각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굳이 과학적인 근거를 따져 들려하지 않아도 나는 그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언덕길이었다면, 아마도 몇 번이나 도중에 멈춰서 거칠게 숨을 내몰아 댔을 것이다. 너와 함께였기에 나는 그 가파른 길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촌동 작은 한강공원에서 너에게 처음 고백하던 날의 너의 미소와 너의 체온이 어렴풋이 기억나. 좀 더 생생하게 떠올리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은 그 자체로 떠올릴 때마다 나를 풍성하게 해주는 보물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들은 점점 색이 바래져가는 사진처럼 기억에서도 바래져 간다. 나는 그게 너무 슬프다. 더 자주 떠올리고 더 자주 보고 싶은데,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애써 건져 올린 추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 풍화라도 된 듯 흐릿하다. 그래서 점점 더 잊혀 간다. 이렇게 잊히다 나중에는 아주 흐릿한 윤곽밖에 남지 않겠지…


 그때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 마음을 머리로는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감정은 잘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아.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너와 나인데, 남의 얘기를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우리가 함께 갔던 곳. 거기에 분명 너와 내가 있었는데... 분명한 사실로 이렇게 기억에 있는데, 마음으로 느껴지질 않아서 어떻게든 증거를 찾으려 헤맨다. 너와 갔던 춘천의 닭갈비집은 이미 문을 닫았다. 너와 함께 갔던 장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그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곳에 남겨져있는 우리의 모습들도 그 변화와 함께 사라져 간다. 너와 내가 함께 머물렀던 그 장소에 새로운 풍경이 덧입혀지며, 더 이상 그곳에는 우리의 모습이 없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이별을 겪는다.


 인연은 참 신기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을 내 앞에 데려다주고, 만나게 해 주고, 사랑하게 해 주더니, 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데려가고 만다. 그리움이 너를 찾아 헤매고 헤매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리움을 감싸 안으면 넓은 광장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든다. 


 너를 마지막으로 데려다주던 때에 그 길은 많이도 가팔랐다.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 매 순간 나는 시간이 그대로 멈추길 바랐다. 마음이 조각조각나 매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에 와서 박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힘든 길이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종착지에 다다렀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너는 끝내 나의 눈을 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처음 너를 맞이할 때 나를 향해 보였던 네 미소가 자꾸만 겹쳐져 보였다.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네 표정을 보는 일이 이별보다 더 슬펐다.


 돌아 내려오는 길에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역설적이게도 그날의 날씨는 최고로 좋았다. 비가 갠 초가을의 하늘에는 별이 참 맑게 보였고, 바람은 적절했다. 나뭇잎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비 냄새가 향초처럼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다독여 주고 있었지만, 눈물은 그 길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그때는 너와의 기억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길 바랐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무참하게 남은 기억을 지워간다. 하루 더 흐릿해지고 하루 더 모호해진다. 다 지워지면 너와 만났던 일도 없던 일이 되는 걸까. 그게 두려워 파수꾼처럼 과거와 지금의 경계에 서서 기억을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지키려 애를 쓰고 있다. 그것만이 너와 내가 함께 살아있었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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