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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2. 2019

시들 자유

시드는 식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안 좋다. 푸르던 잎이 누렇게 뜨면서 점차 말라가는데 보통 되살아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처방도 없어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더 그렇다.


사무실 자리 근처에는 내가 키우는 식물들이 몇 있다. 그들이 사무실로 오게 된 사연이나 정확한 품종도 나는 잘 모른다. 우연히 나와 가까이 있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그냥 내가 돌보게 된 식물들이다.


돌본다는 것이 별게 아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물 한 통 받아다가 몇 번 담그거나 부어주고, 볕이 좋을 때 블라인드 올리고 창문 열어 햇볕과 바람과 가끔 만나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내가 보호자로 이름을 올린 이후로 식물들이 대체로 예전보다 잎이 많이 돋고 푸릇푸릇해졌다. 연둣빛 새잎이 돋아날 때면 나름 기쁘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그 식물 중 하나에서 줄기 두 개 정도 잎이 누렇게 뜨기 시작하면서 점점 시들어갔다. 다른 줄기들은 괜찮은데 유독 두 개 줄기만 그랬다. 진한 초록 잎으로 우거진 사이에 누런 줄기와 잎이 있으니 보기 좋지 않았다. 어차피 되살아나기 어렵다면 그냥 이쯤에서 잘라내 버리는 게 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상용'이라는 말이 있다. '두고 보면서 즐기는데 쓰는 것'이라는 뜻이다. 식물에 '관상용'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움터서 푸르게 자라고  빠르게 또는 천천히 시들어가는 식물의 한살이와는 거리를 가지게 된다. 식물을 관상의 목적으로 보면 푸르고 진한 초록색은 좋은 것이고 시들어가는 색이 끼어 있으면 나쁜 것이 된다. 보기 싫으면 버리는 게 정당화된다.  


시들고 있는 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니 이젠 식물에 기여는 못하겠지만 아직 줄기와 뿌리가 무언가 계속 돕고 있지 싶었다. 성급히 잘라내지 않기로 했다. 화분이라는 좁은 공간에 가두어 키우는 상황인데 시들 자유 정도는 주어야 되지 않나 싶어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두 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들었고 많이 말라버렸다. 어느 날 이제 되었다 싶어 잘라내었다. 그런데, 잘라내면서 화분을 가만히 보니 새 줄기가 연둣빛으로 움터 자라 올라오고 있었다. 연한 색깔이 시들어가는 줄기들과 비슷해서 미처 몰랐었다. 시들어 사라진 가지들이 주고 간 선물인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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