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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pr 12. 2020

눈보다 비가 좋은 이유

첫눈은 있으나 첫비는 없다. 눈송이는 있으나 빗송이는 없다. 눈이 온다고 연락하더라도 비를 핑계 삼지는 않는다. 눈 내리는 성탄절은 기대해도 비 오는 것이 특별해지는 날은 없다. 눈은 일부러 맞으며 즐기기도 하는데 비는 그렇지 않다. 갈길 급하거나 마음 아픈 이들이 맞는 것이 비다. 대개는 급히 우산을 받쳐들거나 종종걸음으로 비를 피한다. 같은 하늘에서 내리지만 눈에 비해 비는 좀처럼 달갑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


눈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요인이 많다. 하늘을 휘저으며 내리는 눈송이는 수직으로 꽂히는 빗줄기보다 보기 좋다. 비처럼 바로 차갑게 스미지도 않아서 툭툭 털어낼 수도 있고, 바닥에 쌓이면 주변 색을 하얗게 바꾸며 내린 만큼 티를 낸다. 게다가 겨울 시즌 한정판이어서 뭔가 애틋한 아쉬움도 남긴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도 않다가 살포시, 그리고 점차 펑펑, 상의 색을 바꾸고 사라지는 눈은 그래서 연인의 사랑과 닮았다. 그래서 눈 풍경이 인상적인 영화는 연인의 사랑을 품고 있다. '러브레터'나 '러브스토리'처럼.

솜처럼 포근해 보이는 눈은 그러나 알고 보면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푹신해 보여도 그 위에 넘어지면 아프다. 다질수록 얼어붙어서 방심하는 순간 미끄러져 다치기 십상이다. 녹으면서 흙모래와 엉겨 한동안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보통 쌓이기 전 털어버릴 생각도 못했고, 조금씩 치워가며 길을 만들 줄도 몰랐다. 원래 눈이란 게, 사랑이란 게 그렇듯이 그냥 넋 놓고 고 있었다. 그러다가 첫눈은 첫사랑처럼 어찌할 줄 모른 채 '어어어'하다 사라졌고, 폭설 같은 사랑은 마음 그늘에 차가운 뒤끝과 상처의 흔적을 남기고 흘러갔다.

비는 눈에 비하면 단순하다. 하늘에서 투둑 떨어져 내려 바닥에 스며들거나 잠시 고였다가 흘러간다. 시즌도 따로 없이 연중 내내 꾸준히 내리니 그냥 비가 내리거니 한다. 보통 안 맞으려고 종종거리고 우산을 펴지만 빗속을 한참 걷다 보면 어느새 흠뻑 젖는다. 눈과는 달리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내리기도 하고, 주변 색을 덮기보다 씻어내려 맑게 한다. 시즌 한정 굿즈 같은 눈과 달리 생필품처럼 우리를 돌보는, 비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닮았다.


눈보다 비가 좋은 이유는 꾸준함과 소박함 때문이다. 내린다며 티 내지 않고 눈처럼 뒤끝도 없다. 기쁠 때 보다 아플 때 같이 하는 빗소리는 마음에 위로가 된다. 우리는 첫사랑이라고 하면 첫눈 같이 찾아왔던 사랑을 떠올리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아기 때 처음 눈을 마주쳤던 첫비 같은 사랑이다. 가끔 소나기 같은 잔소리를 뿌리고 천둥 번개를 날리기도 하지만 투둑 투둑 머리 위로 내려 바로 스며들그런 사랑이다. 축축함이나 후덥지근함이 싫어 가끔 도망 다니기도 했지만 점점 나는 눈보다 비가 더 좋아진다.  

사람들은 봄축제를 취소했지만 자연은 그냥 꽃을 피우고 잎을 내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겨울은 한차례 함박눈을 남기고 멀리 나갔고, 이제는 완연한 봄날이다. 벚꽃잎이 이제 눈 내리듯 날리는데, 맑은 하늘이 계속되며 좀처럼 비 소식이 없다. 이제 한 번쯤 봄비가 내려 바닥에 벚꽃잎 점점이 떨어져 흩어지면서 봄은 지나갈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눈을 향해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며 안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봄비가 내리고 나면 첫비 같은 첫사랑에게 한번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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