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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l 23. 2020

사흘과 3일

어릴 적에 엄마가 심부름을 시켰다. "가게 가서 계란 한 줄만 사 오너라." 요즘에야 계란을 보통 한 판 씩 사지만 그때는 그렇게 낱개로도 사고 그랬다. 별생각 없이 가게로 갔다. 계란 앞에서 나는 당황했다. 분명 한 줄이라고 했는데 계란 판의 가로와 세로 개수가 달랐다. 그래서, 다섯 개를 샀는지 여섯 개를 사 갔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내가 사 온 계란을 보더니 엄마는 왜 그만큼밖에 안 사 왔냐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계란 한 줄은 열 개를 말하는 단위였다.

언어는 사람 사이 의사소통의 매개체라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해석이 다르면 곤란하다. 서로 이해의 거리만큼 오해가 생겨 같이 일을 도모할 수가 없게 된다. 그동안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는 가끔 이슈가 되는 단어들이 오르곤 했다. 특히 법률 용어들 '탄핵', '인용', '기각', '구상권' 같은 것들이 뉴스에 등장하고, 바로 검색 순위에 올라올 때는 낯선 단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흘'이 순위에 올랐다고 했다. 임시공휴일로 연휴가 3일인데 '사흘'이라고 썼다고 그렇단다. '사흘'을 4일로 착각한 이들이 꽤 많았나 보다. 많이 쓰는 말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기도, 새롭게 생성되기도 한다. 좀 이상하다 싶은 말도 널리 사용되면 표준말이 되고 맞춤법에 맞는 말이 된다. 내 기준으로는 '사흘'이라는 말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단어였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실 요즘은 하루, 이틀 정도 단어는 많이 쓰지만 날짜가 커질수록 잘 쓰지는 않는다. 이레, 여드레, 아흐레 같은 표현은 이제 좀 낯설다. 1일, 2일 같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을 점점 많이 쓴다. 줄넘기나 윗몸일으키기 숫자를 셀 때도 처음에는 하나, 둘로 시작해서 쉰, 예순으로 가다가 어느덧 그렇게 세기가 힘들어서 숫자 셈으로 바꾸어 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숫자로 세는 것이 말하기 쉽고 서로 오해가 없다는 면에서는 더 적합해 보이긴 하다.


'사흘'을 이해 못하는 이가 있는 것처럼, '레알'이나 '인싸', '덕후' 같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 또한 많다. 세대 간에 배우고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서 그렇다. 그건 틀린 것이 아니다. 서로 간에 자기가 아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고 비난할 이유는 없다. 사실 이번에 '사흘'이라는 뜻을 몰라도 17일이 임시공휴일이라 15일부터 17일까지 휴일이라는 내용 전달에는 문제가 없었다. 별일 아니다. 계란 심부름에서 계란을 덜 사 와서 다시 한번 더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 조차 없다. 휴일이 하루 더 생겨서 그냥 쉬면 된다. '사흘'의 정확한 뜻을 몰랐으면 이 기회에 알면 된다.


다만 아름다운 우리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말 갈래 사전' 속의 3만 6천 개 우리말도 예전에 한창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멸종하는 천연기념물처럼, 언어는 한번 사라지면 되살리기 어렵다. 언어 표현은 풍부할수록 좋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느껴지는 어여쁜 정서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서른 즈음에'를 '삼십 정도에'라고만 쓴다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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