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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r 20. 2021

눈오리 집게를 사는 마음

3월의 퇴근길. 버스 정류장 옆 노점에서 눈오리 집게를 팔고 있었다. 눈을 모아 찍으면 작은 오리 모양을 만들어주는 기구. BTS의 멤버 RM이가 눈오리를 찍어 만들어 놓은 사진을 SNS에 올리고 나서 더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겨울에는 구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늦겨울이 되어서야 소품 가게에서 파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이제 뭐 눈이 더 오겠어.' 하며 사지 않았고, 그러고 나서도 함박눈이 두어 번 더 왔었다.

사진 : 방탄소년단 Twitter @BTS_twt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했을 뒤늦은 눈오리 집게. 4,900 원 하던 집게가 이제 2천 원으로 가격이 내려왔다. 핑크색 집게 한 개가 남아있었다. 노점상 아저씨에게 "이제는 날씨가 따뜻해서 올겨울 되어야 오리 찍을 수 있겠네요." 했더니, "아니에요. 이걸로 밥 눌러서 주먹밥도 만들어 먹고 그래요." 하며, "노란색이 더 인기라 다 나갔고, 이거는 그냥 1,500 원만 주세요." 하며 500원을 더 깎아준다. 집에 가져와서 현관 옆에 올려놓았다. 이제 봄눈이 내릴 일은 없을 것이고, 눈오리 집게는 올겨울 함박눈을 나와 같이 기다리며 계절을 보내겠다.

사진 : 네이버 웹툰 '독립 일기' 62화 <눈 온다>

눈오리 집게를 사는 마음은 기다림의 동지를 만드는 이다. 아내가 아기를 가졌을 때, 아기가 나중에 신을만한 작은 아기 신발을 사다 놓았다. 신발을 눈에 띄는 장식장에 올려놓고 아기 신발과 함께 첫아이를 기다렸다. 첫째가 태어나 그 신발을 신을 때, 기다림의 시간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금방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힘든 시간이 언제 지나나 싶겠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눈오리를 만들며 지금 순간회상하는 때가 올 것이다.

사물은 기다림을 품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그 기다림을 함께 한다. 달력이 숫자 하나하나 품은 기다림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우리는 그날을 함께 기다린다. 오븐에 요리를 할 때 곧 익혀 나올 맛있는 요리는 타이머와 함께 기다린다. 봄에는 봄꽃과 함께 열매를 기다리며, 땅에 심은 씨앗과는 움터 오를 싹을 함께 기다린다. 벽장 속 선풍기며 여름옷, 수영복, 캠핑도구, 서랍 속 여권 같은 사물들 모두 기다림의 동지들이다. 같이 기다리는 동지들이 많을수록 기다림은 덜 외로운 법이다.


겨울이 되어 눈오리를 찍어 만들 때가 되면, 백신도 많이 맞을 테니 지금보다 세상은 좋아져 있겠지, 아이들은 새로 접한 군대와 고등학교에서 지금보다 조금은 더 단단해져 있겠지. 올여름 이사  집에서 나는 여전히 무사히 출퇴근 잘하고 있겠지. 이런저런 바람들을 핑크색 눈오리 집게와 함께 나눠본다. 같이 눈오리를 척척 찍어낼 좋은 겨울을 기대하며, 올해를 차근차근 잘 넘겨야겠다. 그때까지 오리 집게괜한 밥을 누르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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