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보다도 더 얼마 전에, 나는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무겁지도 깊지도 않은 그저 한 문장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근원적인 삶이 아닌, 뜬구름 잡는 느낌으로 다가갔다. 어떤 정립을 내리기 위해서는 나만의 기준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조지오웰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내게 와닿는, 내게 질문을 던지는 문장과 맞닥뜨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함과 너른 빈터. 이 단어들은 내게 어떠한 안정감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우연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 글에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안정감’이었다. 읽다가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는데, 의식하지 못했던 내 가치관을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이나 자연스러움도 내가 원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안정감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순간적인 꾸밈에서 즐거울 순 있겠지만, 그것을 꾸준히 지속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꾸며진 상황과 모습을 본연의 나라고 말할 순 없으니 말이다. 즐거움이 지속적인 행복으로 도달하려면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강도가 따라와야 할 것 같다. 걸음이 느려 달리기를 선택하고, 더 빠른 자전거도 타보지만, 곧 더 빠른 자동차의 존재를 깨닫는 것처럼.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 내게 행복이란 순간적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이 아니라, 은은하고 조용하게 감싸오는 것에 가깝다.
나는 늘 창작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거창하지 않아도 꾸준히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삶. 일인분의 삶이라는 표현이 있다. 내가 은근히 좋아하는 표현인데, 딱 단순해 보이면서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량의 일인분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정해진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양을 혼자서 차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정량 안에서 나 이외에 타인을 받아들일 때, 이전에는 없었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더불어 따뜻한 온기도 잊지 않고 생겨난다.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눌 때 생겨나는 온기.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일인분의 삶이라는 건, 혼자만을 위한 일인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떠올린 질문,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지금 돌아보니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로. 내 앞에 놓인 삶에는 뭉근한 안정감이, 은은한 행복이,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