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당연한 일에는 이유가 없어. '그냥'하는 거야.
종종 나에게 왜 글을 쓰게 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인스타그램 DM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묻기도, 내가 글 쓰는 걸 우연히 알게 된 지인들이 묻기도 한다. 하지만 '왜'라는 이 질문엔 늘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대답하기 멋쩍은 구석이 있다. 그들을 납득시켜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함께 전해지기 때문일까. 그래서 늘 대답을 머뭇거린다.
살면서 나는 점점 더 내향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더불어 언젠가부터는 나의 속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이 극도로 힘든 사람이 되어간다. 어렸을 때는 한 두 마디의 가벼운 공감에도 위안을 잘만 얻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왠지 나는 내 문제를 타인에게 털어놓는 것이 더 이상 궁극적인 해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입을 닫게 됐다. 아, 사람에게선 구원받을 수 없는 거구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진정한 공감 및 이해는 다른 것이니까.)
그때부터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글쓰기의 시작이 아니라 글을 읽기 시작한 시점이다. 어떤 우연한 한 권의 책이었는데, 그 속에 족족 나를 공감시키는 말들이 있었다. 작가의 가치관과 내 상황이 맞아떨어질 때 그런 눈부신 경험이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나를 직접 위로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치유를 받았다. 그 이후, 글이 나를 치유해줄 수 있다는 걸 어떤 종교처럼 믿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책은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였다. 세상 사랑스러운 베이비펌의 최강희가 주연했던 그 드라마의 원작소설이다. 드라마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입이 마르게 '책이 드라마(혹은 영화)보다 낫지'라고 말하는 데에는 정말로 그 이유가 있었다. 몇 마디 대사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들이 책에는 고스란히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을 끝내고 그 아픔을 버텨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스무 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실연도 아니었건만 나는 실연으로 방황하고 있었고, 친구도 고양이도 나를 위로할 수 없었지만 그 책만은 나를 위로했다. 아주 덤덤하게 다 지나갈 거라고, 나도 다 괜찮아졌으니 너도 그럴 거라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무언가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로부터 십년이다. 십년이라는 지지부진한 시간 동안, 나는 단순히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서서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 변모했고, 지금은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슬프게도 작가는 공무원 시험처럼 합격-취업으로 이루어지는 구조가 아니라서,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통해 생활비를 벌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직도 누군가에게 글을 ‘왜’ 쓰는지 설명을 해야 하는 단계에 있나 보다. 하지만 다른 일로 생계를 잇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글이라는 내 꿈을 놓지 않고 있으니 글쓰기가 내 사명이요, 작가가 내 꿈인 건 맞는 거겠지. 그렇다고 봐야겠지. 꿈이란 게 사실 좋아하는 일을 내 곁에 두고 싶은 그 순수한 마음의 원형일 테니까. 그러니 아주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을지언정, 글쓰기는 영원히 나의 빛나는 꿈인 것이다. 타인을 납득시키기는 힘들어도 나에게만큼은 소중한 꿈.
글과 무관한 나의 일터는 어제도 그제도 참 많이 바빴다. 목이 쉬도록 언성을 높여야 했고, 끊임없이 물건을 이고 지고 하는 끝에 어깻죽지가 뻐근하다. 무엇보다 온종일 사람과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멘탈은 주의력결핍장애를 가진 아이의 그것처럼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마치 머릿속에서 누가 사물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럴 때도 내가 아는 유일한 해결법은 바로 책을 집어 드는 일. 더 이상 책이 내게 억지로 읽어야 하는 '청소년 필독도서'가 아닌, 심신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바이블'이 된 지 오래라, 나는 이런 방법으로 오늘도 나를 위로한다. 책을 읽어야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책을 읽고, 그 이유로 작가를 꿈꾸게 됐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 나처럼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줄 몰라 서성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언젠가 나의 글이 그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길,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수프가 되길, 하는 마음에서 내 꿈은 존재한다고. 아니 그걸론 부족하다.
아니면 글이 곧 나이고, 내가 곧 글이고, 글을 떼 놓은 내 삶을 생각할 수 없으니 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라고 바보처럼 말한다면 질문자에게 답이 되려나. 사실 모르겠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남편과 엄마와 아주 소수의 친구들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지만, 이따금씩 훅 하고 질문을 하고 들어오는 낯선 이들에게는 말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너무 좋아하는 일에는 오히려 '왜'라는 말을 붙이기가 힘들다는 걸, 당연함과 강력하게 유착되어 이제는 나 자신조차도 명쾌하게 한 가지 시점이나 이유를 꼽기 힘들다는 걸, 가끔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는 내 욕심이기도, 쾌답을 원한 질문자의 욕심이기도 할 테다.
만약 누군가에게 "왜 이 꿈을 꾸게 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혹시나 상대방이 "어어... 글쎄요..."라고 한참을 생각한다면, 그 꿈은 너무 오래된 데다 그 자신 자체라서 딱히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은 비교적 드물지만 그래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니, 그럴 땐 그들의 버퍼링을 질문자가 이해해주는 태도가 조금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를 왜 사랑하냐는 질문처럼, 어떤 이에게는 왜 그 꿈을 꾸냐는 말도 똑같이 어렵다.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