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경험했던 게 나중에 유용하게 쓰인다? 진짜루!
과거에 했던 게 유용하게 다 돌아와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뿅뿅 지구오락실>에 이런 장면이 나왔다. 출연진들이 밥상 앞에 모여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오마이걸 멤버인 ‘미미’가 스포츠 댄서 출신인 개그우먼 ‘이은지’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한 것. “과거에 (경험)했던 게 나중에 다 (유용하게) 돌아와 진짜” 그 말을 듣고 문득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이은지는 <코미디빅리그>에서 ‘라틴댄서 루나’라는 역할로 데뷔했다. 당시에 나도 TV에서 이은지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신인이었던 그녀가 지금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1티어 개그우먼이 될 줄 몰랐었는데.
시간이 지나 이은지의 행보를 돌아보니, 언뜻 개그라는 직종과는 무관해 보이는 스포츠댄스 경험이 그녀의 커리어에 톡톡한 기여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데뷔 캐릭터였던 라틴댄서 루나는 물론, 유튜브에서 인기 동영상으로 떡상을 하며 지금의 이은지를 있게 한 ‘길은지’ 역할도 그 당시 잘 놀고 춤 좀 춘다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거기에 더불어 지금의 나영석PD 사단과 함께하는 <뿅뿅 지구오락실>에서는 아이돌 멤버들과 함께 춤을 맞추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일 정도이니, 그녀의 춤 경험이 개그우먼 경력 전반에 톡톡히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오마이걸 미미가 “과거에 했던 게 다 돌아와”라고 한 대목은 바로 그런 것을 일컫는 말이었을 터.
짧게 지나간 그 장면에 내가 울컥 한 건, 다름 아닌 내가 살아온 궤적에도 적용해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각고 끝에 간신히 글 쓰는 삶을 살게 되긴 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했더라면’, ‘직장 생활하느라 글을 더 일찍 못썼잖아’ 하는 후회. 지나간 과거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전공의 길을 택하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웠고, 자책이 심할 때는 살아온 시간들이 모두 허송세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경험들도 뼈가 되고 살이 될지니
하지만 살다 보니 그런 의외의 경험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때도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는데. 가령 예로 들면 이런 것이다. 글쓰기로 전공을 하지 못한 탓에 나는 20대 대부분을 글쓰기와 무관한 직장생활을 해왔는데, 그때의 다양한 직장생활 경험들이 의외의 글쓰기 소재가 되거나, 회사나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식견을 넓혀줄 때가 있다는 거다. (하물며 마지막 직장인 백화점은 아예 통째로 책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그때 배워둔 다양한 업무 프로세스나 프로그램 등의 얕고 넓은 기술들이, 지금까지도 생활하는 데 깊이 쓰이고 있음을 느낄 때는 어쩐지 짜릿한 기분마저 들 때도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기막힌 순간들도 발견할 수 있다. 중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반 친구들 중에는 포토샵을 잘하는 친구들이 항상 몇 명씩 있었는데, 나는 무슨 욕심이었는지 그런 친구들에게 야매로 포토샵을 조금 배워두었었다. 학업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단지 당시에 유행이던 미니홈피에 내 사진을 예쁘게 편집해서 올리기 위해서였다. 온통 영어로 된 데다 생전 다뤄본 적 없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이것 저것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져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스터를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 작가가 된 요즘의 나는 SNS에 글을 게재할 때 조금 더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매번 포토샵을 사용하고 있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사소한 배움이 현재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가.
실제로 가끔 내가 SNS에 예쁘게 글을 편집해서 올리는 걸 보고, “죄송하지만 편집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무슨 어플 쓰시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포토샵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히는데, “이걸 직접 포토샵으로 했다고요?”, “아.. 너무 예뻐서 어플 쓰시는 줄 알았는데 고급 기술이라 저는 엄두도 안 나네요”하면서 놀라는 분들이 많다. 그럴 때면 어릴 때 야매로나마 배워둔 기술이 참 잘도 쓰이는구나 싶어 의기가 양양해진다.
포토샵을 배워둔 경험은, 이후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을 제작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프로그램 조작법이라는 게 조금씩 다 다르긴 해도 만져본 경험이 있으면 습득 능력이 남들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도 믿음의 벨트란 게 있다면, 경험에도 어쩌면 믿음의 벨트란 게 있는 게 아닐까. 연결 연결 연결..., 인생을 길고 넓게 바라본다면, 아무리 자질구레하고 무용해 보이는 과거의 작은 일들조차도 모두 언젠가 반짝이는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뭐랬어? 라고 혼날 것만 같아
여담이지만 이은지의 동료 개그맨으로도 잘 알려진 ‘쿨제이’ 역할의 ‘김해준’ 역시 과거 옷장사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쿨제이는 동대문에서 쉴 새 없이 입을 털어대며 호객행위를 하는 옷가게 오빠 캐릭터다. 누구라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옷가게 오빠 역할을 찰떡같이 연기하는 그를 보며 정말 놀랍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경험의 짬바였다. 경험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와 쓰임이 될지 모른다.
즐겁게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로는 웬일인지 마음 한구석이 편해진 기분이 든다. 그동안 너무 긴 시간을 쓸데없는 경험들로 방황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무의미한 경험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행여라도 앞으로 후회 비슷한 걸 했다가는, 오마이걸 미미가 내 귓전에 대고 외칠 것만 같다. “내가 뭐랬어? 과거에 했던 게 다 돌아온다니까”
지금의 자잘한 경험들이 앞으로의 삶에서 어떤 쓰임으로 나타날지, 어떤 특별한 기지로 발휘될지 누구도 미리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되새겨야지. 중요한 건,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은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유용한 경험들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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