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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Sep 01. 2023

애물단지 치킨무

보물단지 만들기

치킨무는 채식일까? 아닐까?

"당연히 채식이지, 무로 만들었는데." 남편이 치킨무 한봉지를 앞세우며 말했습니다. 사실 저희 남편은 9년 전부터 조그만 닭강정 가게를 운영해오고 있는데 최근들어 매출이 급감하면서 급기야 유통기한이 임박한 치킨무를 집으로 실어나르고 있죠.


요리연구가님 잘 부탁합니다.


팔 수도 없고, 버리에도 아까우니 집으로 가져오는 걸 이해하지만 냉장고에 쌓여만 가는 치킨무는 어쩌라고! 불만가득한 저의 표정을 보던 남편은 '요리연구가'라 부르며 제 기분을 띄워주기 시작합니다. 치킨무는 채식일까? 아닐까? 란 불편한 질문을 던진 건 불편한 심기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는데 말이죠.



#조연에서 주연으로

새콤달콤 치킨무. 치킨을 먹을 때 빠질 수 없는 영혼의 짝꿍. 어릴 때도 아빠를 따라 호프집에 가면 통닭을 먹기 전 새콤달콤한 치킨무부터 입에 넣고 보지 않았나요? 어른이 돼서도 침이 고이게 만드는 새콤한 맛은 치킨을 먹기 전 입맛을 돋아주고, 통닭이 나오기 전 생맥주의 안주 역할마저도 톡톡히 합니다.


게다가 닭다리를 뜯으며 느끼했던 맛까지 가볍고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요물. 여러 매력을 발산하는 치킨무의 쓸모는 백번천번을 칭찬해도 아깝지 않죠. 하지만 그가 빛을 발하는 건 오로지 '치킨'이라는 주메뉴가 옆에 있을 때 뿐이었습니다.


기름지고 느끼한 닭튀김을 먹을 때 꼭 필요한 사이드메뉴. 치킨무는 당당하게 홀로 서지 못 하고 치킨의 느끼한 맛을 가려주는 오로지 보조적인 역할만 해왔던 것이죠. 저도 채식을 시작하기 전에는 치킨무'만'의 매력을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닭의 기름진 맛에 가려진 치킨무만의 순수한 매력. 안개처럼 흐릿하게 인식해 온 치킨무의 존재는 육식지향적인 외식구조가 매력을 가려버렸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올랐습니다. 치킨이 날 가스라이팅 한 것인가?

 


#채식일까? 육식일까?

치킨을 시켜야만 치킨무를 먹을 수 있는 더러운 세상. 이런면에서 치킨무는 채식인가? 아닌가?란 의문이 듭니다. 육식을 동반해야만 먹을 수 있는 채식. 미나리 많이 주는 삼겹살집에서 주로 미나리를 맛있게 먹는 저는 '미나리 요릿집'이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1일1채식을 하고 나서 부터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남편은 닭강정집 사장입니다. 9년 전채식인이 아니어서 뜯어 말릴 수 없었지만 지금 남편이 닭강정 가게를 시작한다면 정말 인생을 걸고서라도 뜯어 말리고 싶습니다.


공장식사육, 동물권을 떠나서라도 지금 지구에 닥친 기후환경위기와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달라진 소비패턴, 채식의 부상, 늘어가는 샐러드집과 운동관련 비즈니스만 봐도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가능성과 사업성을 따져보면 지속되는 경기불황 속에 건강과 동떨어진 육식 위주의 외식사업은 아마 더 심각한 레드오션이 되지 않을까? 란 생각도 듭니다.



#닭강정은 이제 굿바이.

튀긴 닭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물에 빠진 닭보다 튀긴 닭을 선호하던 남편은 나름 닭을 잘 튀겼습니다. 닭껍질에서 올라오는 은근한 비린내 때문에 그닥 닭튀김을 선호하지 않았던 저도 맛있게 먹었던 걸 생각하면 남편의 닭강정은 꽤 괜찮았죠.


또 본인도 닭강정 가게가 적성에 잘 맞았는지 어느정도(?) 동네에 입소문이 나면서 단골들이 늘어갔고 2~3년만 하겠다던 가게를 9년째 운영 중입니다. 하지만 올해들어 상황이 안 좋아졌고 남편 손에 들려오는 치킨무가 늘어갈 때마다 저의 마음이 착잡해왔죠.


그래서 저희 부부는 얼마전 가게를 내놓고 새로운 사업을 물색해보기로 했습니다. 사회적인 트렌드와 경기상황, 여러 환경들이 변해가는 속에서 9년 전 사업아이템을 계속 유지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1일1채식을 시작하고 부터는 남편이 퇴근할 때마다 풍기는 닭 비린내에 더 예민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루빨리 남편이 가게를 관뒀으면 하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갔죠.

 


#치킨무로 만드는 채식물김치

그렇게 오늘도 냉장고에 쌓여만 가는 치킨무를 꺼내서 채식물김치를 만듭니다. 예상외로 가족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특히 젓갈이나 액젓을 넣지 않고 톳, 다시마로 감칠맛을 낸 와인물김치는 어머님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치킨무 2개를 국물과 함께 비트(200g), 일반 (200g) 버무려 소금기를 뺀 톳(100g)과 구운 다시마를 넣은 후 식초 2큰술, 700ml를 붓고 2일 동안 냉장숙성하면 끝.


여름에는 여기에 딱딱이 복숭아를 200g정도 넣어 줬더니 은은한 향기에 물김치가 더 맛있어졌습니다. 복숭아 대신 배를 넣어도 상관없어요.


빨간 비트에는 베타인이라는 색소가 포함되어 세포 손상을 억제하고 토마토의 8배에 달하는 항산화 작용으로 암을 예방, 염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출처: 우수식재료디렉토리)

다른 채소에도 간이 스며들면서 치킨무의 강렬한 달달시큼함은 국물을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해집니다. 톳과 다시마에서 나오는 짠맛과 감칠맛 때문에 다른 조미료나 소금간은 필요없어요. 오로지 식초 2큰술이면 싱거운맛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물김치를 만들어도 치킨무는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다른 레시피로 당근과 섞어 '피클'을 만들어 보게 됐죠.



#냉장고 땡처리의 주역

피자, 라면, 부침개 등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피클은 치킨무만 있으면 쉽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선물용으로도 좋아서 예쁜 유리병만 있으면 나눔하기에도 좋아요.


냉장고에 쟁여두었던 당근이나 무,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몇 개를 치킨무와 넣으면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아져요. 여기에 바질과 청양고추 2개, 프라이팬에 살짝 구운 다시마를 함께 넣어주면 채소 싫어하는 남편도 잘 먹는 '건강피클'이 완성됩니다.

아삭아삭하면서도 살짝 단맛이 나는 당근은 치킨무를 만나면서 상큼새콤한 맛이 입혀집니다. 이렇게 매력 많고 쓸모가 많은 치킨무의 매력. 언젠가는 사람들이 더 알아줄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때는 '치킨무'라는 이름 대신 새콤무라고 불러주고 싶답니다. 


육식 위주의 트렌드에서 채식이 조명 받는 날, 치킨무도, 저 같은 사람도 주목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냉장고에 쌓여만 가는 치킨무처럼 저는 오늘도 브런치 냉장고에 글을 쟁여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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