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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Jul 26. 2019

자유형이 되는 것 같아

물잡기를 해내다 


"수영 얼마나 했어요?"

라는 대답에 있는 그대로 답하는 게 사실 조금 민망하다. 작년 11월부터 시작했지만 늦잠, 이사, 출장 등의 이유로 내 수영 출석부는 구멍이 뻥뻥 뚫려있기 때문. 실력으로 따져보자면 내리 개근한 3~4개월 차와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못할 테다.


새로 등록한 저녁 9시 반에 처음 간 날. 같은 기초반의 다른 사람들은 이제 막 발차기를 뗀 것 같았다. 난 그래도 저 수준은 아닌데! 수영 선생님에게 평영 발차기까지 배웠다고 살짝 얘기를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자유형을 보더니 '응- 다시 배워'라는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나는 슬그머니 기초반의 자유형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얘기하지 말걸. 이전 반에서는 배영과 평영까지 깔짝댈 정도는 배웠는데 또다시 자유형이라맥이 풀렸다. 나는 평생 자유형을 못 넘어갈 운명인 걸까.


이번 수영 선생님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들을 많이 얘기했다. 물을 잡으세요, 물을 끝까지 갖고 가세요, 롤링이 중요해요, 앞으로 미는 느낌이 있어야 해요 등등. 하지만 잡고, 롤링하고, 미는 어느 것 하나 머리에 와닿지를 않았다. 어느 날은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그래서 도대체 물을 어떻게 잡는 건데?"라고 투덜거릴 정도로 살짝 이골이 나버렸다. 하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이젤 앞에서 함박웃음 짓는 밥아저씨 같은 수영 선생님을 노려보며 시키는 대로 반복할 수밖에.



"힘을 좀 빼보는 게 어때요?"

추상적인 그 단어들이 무슨 말인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자신감이 부풀 때마다 선생님은 늘 "하나도 안되고 있어요"라는 박한 평가로 콕- 바늘을 찔러댔다. 그는 당근보다 채찍 파인 게 틀림없다. 기대와 실망이 여러 번 교차하면서 나의 수영 사기는 한풀 꺾여다. 역시 난 운동은 아닌 걸까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때에 찾아온 전환점. 팀 워크숍으로 간 리조트 수영장에서 자유형을 깔짝대던 나에게 팀원이 한 마디를 해줬다.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힘을 빼보는 게 어때요?" 손? 힘? 내가? 이전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내가 정말 그런가? 반신반의하며 손을 탈탈 털어 손끝까지 힘을 툭툭 빼고, 다시 한번 수면을 저어보았다. 유레카. 나는 드디어 물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손끝까지 빳빳하게 세워 힘을 주면 물을 뒤로 밀어내면서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제자리에서 물을 아래로 찍어내리는데에 그치게 된다. "나 물 민다!!! 민다!!!!"는 느낌으로 찍어내리기보다는 "어디 밀어볼까~"라는, 손으로 유유자적 노를 젓는 느낌으로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 손에 힘을 한가득 쥐고 있으면 물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무엇인가 손에 잡기 위해서는 내 손에 가득 차있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놓아줘야 한다. 



"회원님은 이제 성인풀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최근에 읽었던 "배우는 법을 배우기"라는 책에서는 배움의 과정에서 무엇인가 잘 안된다면 일단 멈춰 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작정 이상향을 그리며 반복 동작을 꾸역꾸역 밀어 넣기보다는 나의 무의식적인 습관과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내가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봐준 팀원 덕분에 나는 뜻밖의 정체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한번 감을 익히고 나니 진짜(!) 자신감이 붙었다. 평소 같았으면 두세 번 하고 쉬었을 텐데 이젠 쉴 틈 없이 작은 아동풀을 왔다 갔다 했다. "느낌"을 모르는 상태가 주는 갸우뚱함은 연습을 멈추게 했지만 "느낌"을 아는 상태가 주는 묘한 쾌감은 연습의 속도를 올렸다.


수업 종료 10분 전. 성인풀에 있던 선생님이 아동풀로 돌아왔다. "한번 해보세요" 두근두근. 약간의 부담감과 자신감을 갖고 다시 팔을 휘저었다. 선생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설마 이것도 아닌 것인가? 설마? 무거운 마음으로 샤워장에 향하려는 찰나,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회원님은 이제 성인풀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이 선생님, 포커페이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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