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생활도 어연 6개월. 순식간에 세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이젠 2호선보다 3호선이, 강남보단 종로나 을지로가 편해졌다. 8년을 들고 다녔던 집 키가 없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도어락 비밀번호는 마치 지문처럼 나의 손가락에 착 감겨서 내가 아무리 꽐라가 될지언정 침대 위에 무사히 쓰러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사는 금호동은 재밌는 동네다. 서울 어디든 조금만 골목길로 들어서면 2000년대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풍경을 만날 수 있지만, 금호동만큼 옛 풍경과 세련된 도시 풍경이 뚜렷하게 공존하는 곳은 드물다. 금호역 1번 출구로 나와 언제 도색이 벗겨진 건지 가늠할 수도 없는 낮은 건물들 사이로 비좁은 인도를 걷다 보면 왁자지껄한 시장 골목이 나오고, 90년대 체험 터널 같은 그 시장 골목을 지나면 유명한 브랜드 아파트들이 군집해있는 말끔한 사거리가 나온다. 서울의 발전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해야 할까. 트럭을 몰고 온 과일 장수 아저씨가 인도 한쪽에서 사과를 팔고, 바로 옆 도로에선 마세라티, bmw, 벤츠같은 외제차가 줄지어 지나가는 이상한 동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묘한 조화.
이 조화마저 익숙해질 때 즈음에, 나는 다시 떠나야만 하게 될까?
세 번째 서울 집, 염리동 투룸에서의 2년 (보 6500)
내가 살던 곳은 마포프레스티지자이 109동과 108동 사이, 그 어디쯤.
두 번째 집에서 세 번째 집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월세 때문이었다. 피 같은 50만 원을 매달 주인아줌마 통장으로 퍼주는 건 더 이상 못하겠다는 언니의 각성 덕분이었다. 엄마와 언니는 돈을 모으려면 일단 전세로 옮기자고 합의했고, 마침 바로 맞은편 염리동에 적당한 투룸 전세 매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로만 건너면 동이름이 바뀌는 곳이었구나. 어쨌든 여전히 무수입에 철없는 휴학생이었던 나는 사실 월세가 어떻고 전세가 어떻고는 관심이 없었다. 방이 두 개가 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뿐.
세 번째 집은 이대역 5번 출구로 나와 쭉 걷다가 좌회전 한번, 얕은 오르막길을 살짝 오르다 다시 우회전하면 나오는 다가구 주택 골목의 중간쯤에 위치해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 동네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유리가 아닌 철로 만들어진 용 모양 대문으로 둘러싸인 2층 혹은 3층짜리 다가구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나의 세 번째 집은 3층이었는데, 집주인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강아지와 함께 2층에 살고, 우리는 서너 개 계단을 올라야 하는 2층 같은 1층에 살았다. 반지하 같은 1층에도 누군가 세를 들어 살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네 번째 집으로 이사 가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건너 건너 어떤 집인진 모르겠으나 통신료로 상담원과 실랑이하는, 목청 큰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그 상담원이 측은해질 만큼 아주 잘 들렸는데. 서울의 이웃이란 게 참 그렇다.
방이 두 개가 된다는 건 거실다운 거실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 두 개 사이에 거실이 있는 가로로 긴 집이었다. 침대 하나를 넣으니 꽉 찬 작은 방은 그대로 침실이 됐다. 조금 더 큰 방엔 행거와 책상이 있는,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무튼 잠자는 것 빼고 다 하는 방. 내 방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등과 소음으로 언니와 다투는 일이 적어질 것 같단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때로는 벽이 있어야 서로 행복할 때가 있는 법.
이 집의 거실은 참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한쪽 벽은 적색 벽돌이 그대로 노출되어있어서 요즘 핫플레이스에 빠지지 않는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 어쩌고 같은 느낌을 주었다(무려 2014년에). 다른 벽에는 벽 안으로 5단 정도의 책장이 박혀있어 작고 소중한 우리의 주거 공간을 책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인도에 갔다 온 사진들을 적색 벽돌 벽에 걸어두니 인스타 갬성의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조성되기도 했다. 지금 떠올려보니 굉장히 힙했는데?
벽에 뭐 하나 제대로 박거나 붙이지 못하고 모든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던 월세방과 다르게, 전셋집은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벽지를 새로 바르거나, 장판을 다시 깔거나, 화장실 시트지를 갈거나. 내 취향에 맞게 바꿀 수 있는데 (물론 내 돈으로) 사실 이 말은 무언가 잔 고장이 났을 때에도,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왠지 신경 쓰이는 그 무언가 들도 다 내 돈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사를 마치자마자 조금 많이 촌스러운 화장실 벽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시원한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구름모양 시트지를 붙였는데, 양이 약간 부족해 밑부분을 연두색 시트지로 덮어버린 게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허허. 한편 주인집 할아버지는 무언가 고장 났을 때 굳이 우리 아빠와 통화를 하고 나서야 수리를 해줄 만큼 참 박했다. 나는 종종 엄마에게 셋째로 남동생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말을 하곤 했지.
방이 두 개라 그만큼 더 행복해서였을까. 길 건너 작은 원룸에 살 때보다 기억나는 일이 많다. 열쇠를 집에 두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대문이 잠겨서 언니가 올때까지 소금길을 한참 걷고 걸었던 것, 자전거를 타고 마포대교를 건널 때 내적으로나마 한강변 아파트 주민 코스프레를 해봤던 것, 현관문을 열 때마다 주인집 강아지가 계단을 껑충껑충 내려와 자꾸 치대서 집에 들어가는 게 힘들었던 것, 친척 언니가 취업준비로 잠깐 올라와 같이 살았을 때 나의 웃긴 잠꼬대를 그대로 재현해줬던 것(본인이 잘 때 어떤지 알게 되는 건 꽤나 충격적이다), 인도에 가려고 신나게 10kg짜리 배낭을 싸며 잠 못 이룬 밤, 많이 좋아했던 그 아이와의 첫 데이트를 위해 친척 언니 코트를 빌려 입고 참 많이 설렜던 순간까지.
옛날에 나 여기 살 때, 하고 추억 보따리를 꺼내기에 "마포프레스티지자이"는 조금 많이 운치가 없긴 하다. 떠날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없어지고 나니 아쉬운 이 기분이란. 어쨌든 염리동에서 2년을 좀 덜 살았을 때, 나는 취업 준비를 이유로 염리동을 떠나 봉천동 작은 원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