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의 이사를 거친 서울 살이 9년 차의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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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리동에서의 전세 기간이 만료되기 몇 달 남지 않은 2015년 말, 나의 신분은 자유로운 휴학생에서 먹고 살 궁리를 해야하는 대학교 5학년으로 바뀌어있었다. 더이상 성장기도, 사춘기도 아니라서 고작 한 두살 먹어봤자 몸과 마음은 그대로인데. 책임감과 부담감은 갑자기 온 세상을 회색도시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만큼 그 덩치를 불려놓았다. 넌 커서 뭐가 될래? 라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단어들이 목에 턱턱 걸려버리는, 무엇 하나 뱉어내기도 그대로 소화해버리기도 어려운 그런 때였다.
혼자는 외롭고 힘들다. 같은 동아리 선후배 3명과 소소하게 스터디를 열었다. 오전 8시(지금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시간대다)에 동아리방에 모여 신문과 전문 잡지 아티클을 읽는 스터디였다. 공부 전에 책상 정리가 제일 재밌듯, 우리는 스터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스터디 환경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웃기게도 결론은 "집이 너무 먼게 문제"였다. 학교까지 왕복 2시간 거리에 살았던 한 후배와 나는 "평일에 잠만 잘 방"에 대한 공통된 해결책을 도출해냈다. "평일엔 어차피 학교에 계속 있을텐데 굳이 집까지 왔다갔다하는거 너무 시간 아까워. 평일엔 자취방에서 잠만 자고, 주말엔 각자 원래 집에 돌아갔다가 월요일에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양심에 손을 얹고 통학 2시간을 아껴 취업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절박하디 절박한 상황이냐?"라고 물었다면 나는 조금 머뭇거렸을 거다. 졸업 전에 학교 근처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뒤늦은 로망과 학교까지 걸어다니면 세이브될 교통비를 월세로 내면 되겠다는 기적의 계산법 등등이 포함된 선택이었다.
내가 직접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의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크기에 학교까지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일 것. 직방, 다방 등 부동산 어플을 통해 괜찮아보이는 몇 곳을 추리고 전화를 걸어 매물 정보를 확인했다. 가격이 파격적인 몇몇 곳들은 계약 기간이 한두달로 아주 짧은, 별 쓸데 없는 미끼상품이었다. 부동산 사람들은 만나면 일단 차에 태우고 봉천동 일대를 순회하며 자신들이 아는 매물들을 쭉 보여주었다. 가격이 좋으면 집 상태나 위치가 구리고 집과 위치가 괜찮으면 가격이 나빴다. 아, 나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었지. 우리의 조건이 간단한 만큼 부동산의 논리도 참 간단했다. 이사 시즌만 되면 신경이 한껏 날카로워지던 언니가 생각났고 그냥 많이 미안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 있었다. 후배의 아는 언니가 사는 꽤 괜찮은 오피스텔이었다. 보증금은 2000만원, 둘이서 나누면 천만원. 엄마에게 "세집 살림을 하고 싶으니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기엔 이사 계획 자체가 무산될 수 있는 부담스런 돈이었다. 오케이, 현실 파악 완료. 생전 살아보지도 않은 집에 괜히 미련이 남아 다른 집들보다 천천히 둘러보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우린 타협에 타협을 거쳐 결국 통장 잔고가 감당할 수 있는 보증금 가격에, 둘이 오붓하게 누울 수 있고, 언덕을 좀 많이 올라야 하지만 학교와 가깝고, 어차피 낮엔 집에 없으니 해가 들지 않아도 괜찮은, 깨끗한 반지하방을 하나 찾아냈다. 집 구하기의 핵심은 발품 또 발품이구나, 큰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난생처음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언니, 우리 여기 사는거 유튜브로 찍어요!"라고 해맑게 웃던 후배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쯤 나도 유튜버로 대박을 쳤을 수도 있겠다. 이 말이 그저 이사 첫 날 한껏 오른 흥에 그쳐버린건 당시(2016년) 유튜브가 지금과 같은 파워는 아니었기도 했고, 그 방에 사는 후배와 내 삶이 카메라에 담고싶을 정도로 낭만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자취방, 과사무실, 편의점, 도서관, 동아리방, 면접장을 전전하는 채도 낮은 날들. 작아진 방 만큼이나 내 삶의 진폭도 가장 작아져버린 그런 시기였다.
그래도 그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던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이 사는 후배는 긍정적이고 힘이 넘쳤다. 옷장도 책상도 매트리스도 샴푸도 물도 자매처럼 반반 나눠써도 트러블 한 번 없을 만큼 매너도 좋았다. 가끔 마스크팩을 얹고 맥주 한잔 기울이며 소탈하게 얘기를 나누다보면 나보다 더 언니처럼 느껴지는 그런 친구였다. 함께 하기로 했던 스터디가 파하고 나서는 서로 바빠서 밤에나 겨우 얼굴을 보게 되긴 했지만, 나의 귀가 시간을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다.
단조로운 삶이지만 나름 연애도 했다. 원래 눈물이 많긴 하지만 그 당시엔 아주 작은 이벤트에도 눈물샘이 툭툭 열려버리곤 했는데, 그 눈물들은 모두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 아이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조금 덜 울었다면 조금 더 행복한 애로 기억되었으려나. 사랑도, 미련도, 미움도, '연애감정'이라고 칭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돌이켜보면 고마운 일들이 참 많았다. 경험도 스펙도 짱짱한 면접 스터디원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있던 내게 "할수있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일, 저 멀리 나주까지 보러갔던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엉엉 울던 나를 꼭 안아준 일, 자기소개서 쓰는 걸 힘들어하는 나를 상냥하게 채찍질해준 일, 나는 떨어지고 자긴 붙었을 때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일, 푹 쉬어야 하는 꿈에서까지 취업에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해줬던 일,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와 함께 밤을 보내줬던 일, 옥상에서 내 뒷모습을 예쁘게 카메라에 담아준 일까지.
그렇게 1년이 좀 덜 됐을 때 같이 살던 후배는 원하던 곳에 덜컥 취업을 하게 됐고 나는 혼자 방을 쓰게 됐다. 후배의 짐이 빠진 뒤로 방은 더 넓어졌지만 왠지 모를 갑갑함이 심해져 나는 아주 일찍 집을 나와 아주 늦게 집에 들어가곤 했다. 더이상 유예 없이 졸업을 해버리기로 마음을 먹고나서는 두달정도 남은 계약 기간에 대한 해지금을 지불하고 언니가 살고 있는 왕십리로 이사를 가면서 반지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지막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일까, 나는 이때 이후로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싫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