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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May 06. 2019

반지하에서 이층집까지 (1)

여섯 번의 이사를 거친 서울 살이 9년차의 소회

한 달전 이사 온, 아직 남의 집 같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집에서 밥을 먹고 있던 때였다. 너무 조용해 TV를 틀었더니 <나혼자 산다>에 출연한 잔나비의 리더가 나오고 있었다. 가습기를 세 대는 켜야 하는 건조한 방에서 볕이 들지 않아 암막 커튼 없이도 깊게 자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공용 화장실에서 찬물 샤워를 감행하고 때로는 싱크대를 세면대 삼아 머리를 감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패널의 오버 리액션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서울에서 단 한번이라도 방을 구해보려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흔히들 미친 집값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집은 대부분 아파트다. 아파트도 당연히 뒷골 땡기게 억소리 나는 가격은 맞지만, 입에서 진짜 '미친...' 소리가 나오게 하는건 아파트처럼 좋은 집이 아니다. 몸 한켠 겨우 누이면 끝인 고시원이 월 40~50만원을 오갈때, 빛 한 줌 들지 않는 반지하 투룸이 전세 7천을 넘어갈 때, 집도 가격도 참 괜찮은데 하필이면 90도에 육박하는 비탈길 꼭대기에 있을 때, 진심이 담긴 '미친'이란 단어가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조용히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 달전 이사온 이 집은 서울에서의 일곱번째 집이고, 나는 어느새 서울 살이 9년차가 되었다.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지하철 2호선을 따라 이곳 저곳 많이도 옮겨다녔다. 반지하 방에서부터 기숙사, 원룸, 다가구 주택, 다세대 주택, 연립 주택까지 안 살아본 집 종류가 없다. 다들 아파트 혹은 오피스텔만 사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홀로 반지하 라이프를 가감없이 보여준 잔나비의 리더처럼, 나도 '시발'과 '유레카'를 반복해온 나의 지난 9년을 간단하게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첫 서울 집, 학교 기숙사에서의 1년



    경기도권에 살았지만 운이 좋게 대기 번호를 받아 기숙사에 입성했다. 부모님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2시간 반 거리. 만약 기숙사에서 떨어졌다면 길에서 5시간을 버렸을 생각을 하니 지금도 아찔하다. 내가 살았던 기숙사는 2인 1실의 방 3개가 딸린 아파트 형태의 기숙사로 쇼파와 냉장고가 있는 거실, 그리고 화장실을 공유했다.


    기숙사의 장점이라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의실까지 15분, 과방까지 20분, 벼락치기할때마다 찾는 도서관 20분, 손뻗으면 닿을 거리의 친구들, 놀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수많은 곳들, 술자리에서 통금이나 막차때문에 먼저 일어나는 친구들을 보며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이 모든 것을 일년에 백만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 얻을 수 있었다.


    기숙사의 단점은 '공동생활'에서부터 시작된다. 책임은 분산될수록 힘을 잃는다. 거실 쇼파위의 먼지와 화장실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은 모두가 외면하는 대상일 뿐.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 방향으로 귀를 쫑긋 세워 누가 씻고 있진 않는지 살펴야 하는데, 누군가 씻고 있다면 나는 약 15분 정도 지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냉장고에 무언가를 넣을 땐 친언니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뺏길 것을 먼저 걱정해야 했고, 무언가를 먹을 땐 이 냄새가 누군가에게 불쾌하지 않을지 눈치를 봐야 했다. 


    좋은 룸메이트를 만나는 것 역시 복불복. 나의 첫 룸메이트던 외국인 유학생 언니는 나와 정반대의 생활리듬을 살았다. 그녀는 나의 아침 알람 소리를 힘들어했고, 참다못한 그녀가 거실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나를 저격하는 글을 남긴 이후로 우린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물론 나와 다르게 언니동생친구하며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먹는 좋은 룸메이트 사이도 무척 많다. 


    한편, 기숙사의 정형화된 가구들은 너무나도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나의 취향을 반영할만한 그 무엇도 새로 들일 수 없었다. 기숙사의 묘하게 갑갑했던 원인이기도 하다. 옷장은 새내기의 패션을 담아내기에 너무 작았고, 여름과 겨울의 옷이 공존할 수 없어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으로 옷상자를 보내야만 했다. 작은 책상은 화장품과 책이 뒤섞여 화장도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정말 혼자있고 싶은 시간에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정말 물리적으로 혼자이고픈 시간이 있는데, 기숙사에서는 룸메이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은근한 긴장감이 있다. 룸메이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룸메이트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편히 쉴 수 없는 그런 날에는 방문을 열고 나가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그저 이불 속을 더 깊숙히 파고들 뿐이었다.


    1년이 지나고 나니 혼자만의 공간을 위해 기숙사 대신 자취를 택하는 아이들도 의외로 많았다. 처음부터 자취를 했던 아이들은 기숙사에 당첨돼도 계속 자취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는 아니었겠지만, 그런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부모님께서) 목돈을 마련할 여유가 있는 편에 속했다. 아무리 대학가 자취방이라 해도 보증금이 없진 않았으니까. 신입생이 불쌍했던 하늘의 짧은 배려였는지 나는 2학년이 되자마자 기숙사를 똑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갓 학생 딱지를 뗀 신입사원이었던 나의 친언니는 고대 근처의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언니는 나의 새 룸메이트가 되었다.



두번째 서울 집, 대흥동 원룸에서의 2년 (보2000/세50)


오른쪽 건물이 내가 살던 원룸 건물


    두번째 집은 철저히 언니 위주로 구해졌다. 학생인 나는 지각해도 친구 필기를 빌리면 그만이지만 언니는 지각하면 백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언니의 직장과 가까우면서도 내가 2호선을 탈 수 있는 이대역 근처 대흥동에 한 원룸을 구해주셨다. 원룸에 어떻게 둘이 살아! 라고 생각했지만 일반적인 원룸보다 1.5배 정도 넓은 방에, 끓이고 덥히는 것만 할 수 있을 정도의 주방과 작은 화장실이 현관 쪽에 따로 분리되어있는 '나름' 분리형 원룸이었다. 당시 시세로도 가격이 있는 편에 속했다. 한 층에 6세대, 나는 1층 가장 안 쪽인 103호 주민이 되었다.


    이대역은 큰 대로를 기준으로 1~4번 출구와 5~6번 출구로 나뉜다. 1~4번 출구인 신촌동, 대현동은 이화여대가 있는 번화가 지역이다. 옷 가게, 화장품 가게, 카페 등 젊은이들을 위한 다양한 상점이 즐비한 거리에 학생들, 외국인 관광객, 연인들이 쉴새없이 오간다. 반대편 대로의 5~6번 출구로 나서면 시작되는 대흥동, 염리동은 조금 많이 다른 풍경이다.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을 써붙인 박스들로 입구를 장식한 동네 마트, 길거리에 앉아 고구마와 양파를 파는 할머니들, 온 몸으로 세월을 맞은 간판을 달고 있는 오래된 문방구와 철물점까지.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 공존하고 있다. 


    나의 첫번째 원룸은 이대역 5번 출구에서 쭉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나타나는 거대한 언덕, 그 언덕의 허리 즈음에 있었다. 생수 배달이 익숙지 않았던 그 당시, 생수 2L 6개 세트를 들고 낑낑대며 올라다니다가 결국은 정수기를 렌트하게 만들었던 그 언덕. 5분 거리의 마트도 왠지 모르게 가기 귀찮게 만들었던 그 언덕. 늦은 밤 걷다보면 어느 새 달에 가까워질 것만 같던 그 언덕. 언덕의 머리 즈음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언덕을 올랐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래도 생판 모르는 남과 같이 사는 것보다는 친언니가 나았다. 무수입인 나를 대신해 각종 돈 드는 일에 총대를 맨 것도, 청소기며 TV며 필요한 최소한의 가전을 갖춰준 것도, 가끔 나오는 바퀴벌레를 포함해 이름 모를 녀석들을 혼내준 것도, 아주 가끔 술에 떡이 된 나를 데리고 언덕을 올랐던 것도 언니였다. 


    그런 언니와 종종 갈등을 빚은건 바로 이 "원룸" 때문이었다. 먹고, 자고, 쉬고, 공부하고, 활동하는 모든 행동들이 물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었다. 나는 책상에서 공부하는데 언니는 옆에서 밥을 먹고 있고. 나는 자야 하는데 언니는 옆에서 티비를 보고 있고. 나는 운동하고 싶은데 언니는 옆에서 공부하고 있고. 누군가는 전등을 꺼야하는데 누군가는 전등을 켜야 하는 딜레마의 반복 속에서 언니와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실랑이를 펼치는 것은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삶을 한번에 담기엔 퍽 비좁은 공간, 원룸. 어느 날에는, 살짝 열린 맞은편 문틈 사이로 넉넉한 공간을 혼자 쓰는 이웃집 주민을 보고는 약간의 부러움을 느꼈더랬다. 


    그래도 "혼자 살았으면 더 좋았겠니?"라고 묻는 질문에 내 대답은 NO. 언니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커다란 대도시에 조건없이 나를 챙겨줄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다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든든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서로 나가라며 악을 쓰다가도, 진짜 나갈까 걱정되는 그런 사이. 가끔은 집에 제발 안 들어왔으면 싶다가도, 12시가 넘어서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그런 사이. 다이어트하는데 옆에서 치킨 냄새 폴폴 풍기면 한 대 때려주고 싶게 얄밉다가도, 밥도 못 먹고 돌아다니냐고 구박하는 그런 사이. 각자 통금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도 부모님 연락엔 옆에서 잔다고 눈치있게 받아쳐줄줄 아는 그런 사이.


    언니와의 원룸 생활에 적응해갈수록, 대흥동과도 점점 친해졌다. 더이상 언덕을 오르는게 힘들지 않았고, 집 앞 마트에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으며, 쌩얼로도 이대 앞 예쁜 언니들에게 기죽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고, 홍대까지 산책삼아 걸어갈 정도로 이 곳 지리에 빠싹해졌다.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나는 맞은편 염리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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