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첫 번째 허락

생산성이라는 강박을 내려놓고, 오직 '생존'만을 위한 로그를 남기다

by 누워 사는 개발자

사라진 안전망, 무거운 일상으로의 로그온


병동의 무거운 철문을 나서 마주한 일상은 생각보다 더 낯설고 무거웠다. 병원이 제공하던 강제적인 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로지 나만의 의지로 버텨야 하는 서늘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리드 개발자라는 자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회사를 쉬는 김에 뒤처지지 않게 공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병가 기간이 의미 있지 않을까?"


복직일이 다가오는 날짜를 세며 매일 불안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쉬고 있으면서도 쉬지 못하는, 시스템의 과부하는 멈추지 않았다.




병실에서 배운 가장 낮은 단계의 TODO


불안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입원 중에 썼던 치료 일지를 다시 펼쳤다. 그곳에 적힌 '꼭 해야 하는 일'들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 밥 먹기

- 약 먹기

- 정해진 시간에 잠들기

- 그리고 화장실 잘 가기


복잡한 아키텍처를 설계하던 내게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무너진 시스템을 재건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로우 레벨(Low-level)의 작업들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퇴원을 했지만 여전히 '병가' 중이고, 아직은 아픈 상태라는 것을. 나는 나 자신에게 첫 번째 허락을 건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직 약만 제시간에 챙겨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잠들자."


거창한 성취 대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루틴만을 오늘의 TODO 리스트에 남기기로 했다.




무채색의 감정과 술의 유혹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단순한 일조차 매일이 전쟁이었다. 우울과 불안, 혹은 그보다 더 무서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감정'은 거의 매일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술 한 잔의 유혹이 간절해진다. 술로 시간을 빠르게 지우고 싶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고양이들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는 사소한 움직임들이 나를 현실로 붙잡아준다.


지금 나에게 가장 위대한 성취는 새로운 앱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은 채 맨정신으로 약을 챙겨 먹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다.




오늘도 죽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어떤 날은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버겁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은 하루의 끝에서도, 나는 오늘의 약을 먹은 나를 칭찬하기로 했다. 성공적인 복귀나 완벽한 회복 같은 먼 미래의 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배포였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오늘도 나는 무사히 로그아웃한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잘했다, 나 자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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