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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엄마가 없어?

학교가기 싫어

by 아마추어

철없이 마냥 동네 친구들과 놀기만 하던 시절은 이제 끝이 났다.

나도 이제 학교를 가야 한다.


항상 어울리던 동네 또래들이 아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어울려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부라니.. 나에게도 의무가 생겼다.


설렘 반 긴장반으로 시작된 나의 국민학교 생활,

무엇보다 나의 활동 반경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고작 동네에서 골목 두세 개 안에서만 일어나던 나의 하루가 걸어서 15분 남짓 걸리는 학교까지 넓어져

모든 게 새로워졌다.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한 반에 5-60명씩 하는 반이 한 학년에 10개가 넘고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모인 정신없는 그곳은 혼돈 그 자체였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분위기를 알까?


친구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던 나는 수많은 놀이거리들 중 전자오락실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출처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블로그

당시 10원이면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그 10원은 금세 30원이 되고, 50원이 되고, 100원이 되었다.

시대를 고하고 아이들이 게임에 환장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나 보다.


수많은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 모여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다투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러다 보면 상처 주는 말 들도 하게 되는데

나는 엄마가 없다는 말이 가장 상처였다.


키도 작고 몸도 비실비실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만만히 보였나 보다.

친구들이 엄마가 없다고 놀릴 때면 나는 곧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렇게 울다 하교 후 오락실을 가면 모든 일은 금세 잊혔다.

그렇게 나는 전자오락실과 게임에 중독되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다투게 되면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림받는 게 너무도 싫었다.

그럴 때면 난 왜 남들 다 있는 엄마가 없을까 하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것 같다.


결국 학교는 가기 싫었고 오락실을 가면 마음이 편했다.

오락실은 언제나 즐겁고 모든 걱정과 스트레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버지는 일을 나가시고 어머니는 안 계시고

형 누나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되어 자신들 삶을 살아가니 나는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었다.


학교?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오면

학교로 가지 않고 오락실로 갔다.

오락실에서 사람들이 게임하는 걸 구경만 해도 즐거웠다.


그렇게 오락실에서 일과를 보내고

또래 친구들이 하교할 시간이 되면 다시 집으로 갔다.

일 년에 절반 이상은 학교에 가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학교도 우리 집에서도 이 일을 모르지 않았고

집에서는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길어지자 나를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쯤 온 가족이 모여 비상회의를 해 나를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되는 상황까지 가고야 말았다.


결론은 따로 떨어져 살았던 큰형내외 집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생활하며 큰형수한테 붙들려 강제로 학교에 가게 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회의가 끝난 날 밤 나는 곧바로 학교 가는데 필요한 가방과 책, 학용품 등과 옷가지를 챙겨 큰형 집으로 끌려갔다.


큰형은 낯설었고 큰형수는 무서웠으며

그곳에서 지내게 된 나의 하루는 지옥 같았다.


아침이면 큰형수에게 붙들려 교실까지 끌려갔고

하교시간이면 교문 앞에 어김없이 형수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큰형수에게 붙잡혀 형 집으로 가면 나는 외출을 할 수 없었고

형수가 장을 보기 위해 조카를 데리고 외출을 하면 나는 조그만 다락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어린 조카도 있었는데

큰 형수는 조카 돌보랴 나까지 감시하랴 또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싶긴 하다.


아무튼 어린 나에겐 지옥 같던 생활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그곳을 탈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곤 여느 날처럼 형수가 나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장을 보러 나갔을 때 자그마한 다락방 창문을 통해 나는 집을 빠져나와 이제껏 가 본 적 없는 낯선 동네로 도망쳤다.


국민학교 2학년, 고작 9살이라는 나이에 나는 가출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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