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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릭 Oct 04. 2022

꽃개

가을 냄새가 그득해진 요즘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고, 내 몸이 살찌는 가을.

이런 가을날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는 어느 봄날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거주하는 빌라는 가구단지 안에 위치해 있다.

단지는 차도와 거리가 있는지라 널찍하고 조용하다.

주말에는 가구를 보러 온 손님들로 번잡해지곤 하지만 평일엔 거의 손님의 발길이 없는 편이다.

하여 한적한 가구단지는 멍뭉이들과 산책하는 것에 꽤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준다.  


산책을 하다 보면 단지 여기저기에 계절마다 몸단장을 바꾸는 나무들이 서 있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마음에 힐링을 준다.

하지만 멍뭉이들에게 나무는 힐링을 넘어서는 더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

멍뭉들에게 나무는 바로바로 최신 업데이트가 완료되는 최신형 SNS이다.


벚꽃이 피는 봄이면 견주들은 "꽃개사진"을 찍어 SNS에 앞다투어 올리곤 한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다.


그날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다 못해 흐물흐물 꽃잎을 떨굴 모양새를 갖추었더랬다.

더구나 내일은 강수확률이 65퍼센트에 달해 벚꽃을 즐길 시간에 타이머가 켜져 버린 것이다.


출근 전에 꽃개 사진을 찍어야 한다!

바쁜 마음에 일어나자마자 쭈니, 차니를 소집했다.

비몽사몽 침 흘리던 입매를 혀로 다시고 멀뚱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하네스를 꺼내들자 눈이 반짝해진 쭈니는 내 허벅지를 긁어대기 시작했고, 차니는 끼잉 끼잉 흥분의 울음을 울었다.

2호 형아는 쭈니를, 나는 차니를 맡아 산책길을 나섰다.

빌라 단지 안을 우아하게 걸으며 마킹을 하는 쭈니와 여전히 낑낑 울면서 "동시 네발 뛰기"로 전진 또 전진하는 차니를 컨트롤하며 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를 발레리나처럼 뻗어서 담벼락에 마킹을 하는 쭈니의 머리 위에 가차 없이 오줌 세례를 퍼부울 뻔 한 차니를 겨우 끌어내서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제보다 더 초라해진 벚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사진 찍어 주자.

벚꽃나무로 다가서서 킁킁거리며 친구들 체취를 맡던 쭈니를 2호 형아가 번쩍 안아 들었다.


쭈나! 여기 봐봐!


쭈니 사진을 찍어주는 동안 차니는 냄새 탐색에 심취해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리드 줄을 감았다.

쭈니를 내려놓고 차니를 수습하여 들어 올렸다.


찬아, 요기요기!

 


영, 떨떠름한 녀석들의 반응.

산책 나오자 좋아서 웃던 표정이 싹 달아나다 못해 경직되어 버렸다.

경직된 몸 때문에 포즈도 엉망이 되었다.

다스려보려 해도 뻣뻣한 몸이 예쁘게 컨트롤되지 않았다.

출근시간은 다가오고, 어찌어찌 사진을 찍고 내려놓았다.

다시 표정이 밝아진 녀석들은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면서 킁킁킁킁 냄새 삼매경에 빠졌다. 꼼꼼한 쭈니는 친구들이 남긴 단 하나의 체취도 놓치지 않을 심산으로 한참을 나무 곁에서 머물며 냄새 맡기에 빠졌고, 차니는 냄새를 맡는 둥, 마는 둥, 후루룩 나무를 훑더니 흙바닥을 앞발로 긁으며 땅을 파대며 귀를 출렁거렸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쭈니와 차니는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우리의 리드를 따라 걸었다.


개꽃을 찍어 남기고 싶은 건 나의 욕심이다.

멍뭉이들은 사진이고 뭐고 알바 없다.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 멍뭉이들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의 체취 속에 남긴 메시지를 읽으며 안부를 듣고 안부를 남기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멍뭉이들이 원하는 한 가지를 꼽자면 산책일 것이다.

탁 트인 야외를 거닐며 쉬도 하고 응아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즐거움도 산책을 원하는 이유겠지만, 길을 거닐며 여기저기 남긴 친구들의 SNS 메시지를 찾아 읽는 즐거움도 산책길이 좋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쭈니, 차니에게 약속하겠다.


봄이 오면 여기저기 다양한 곳으로 산책을 나가겠다고.

여름이 오면 시원하게 산책을 나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가을이면 밤낮으로 시간 될 때마다 산책을 나가겠다고.

겨울이면 따스하게 산책을 나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산책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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