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릭 Jan 09. 2023

발, 걸음

목적이 있든 없든,


거리에 내 놓인 발걸음은 항상 바삐 움직이며 길이 지나가길 재촉한다.


무릎사이를 넓직히 떨어뜨린 채 어기적거리며 걷다가 순간 들어온 의식은 살포시 부끄러움이라는 푯말을 들어 친절히 감정을 안내한다.


고무줄로 팽팽하게 묶기라도 한 듯 재빨리 무릎 사이를 붙여 조신한 워킹을 선보인다.


샤락샤락 속삭임이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너무 수줍어서 마치 내 두 볼에 바알간 홍조가 물들어 버릴 것 만 같다.   


이렇게 의식의 발걸음을 걸을 때 조금씩 속도가 높아지면서 시속에 가속이 붙는 게 느껴진다.  그때의 가열찬 느낌, 퍼덕이는 생동감이란…, 시원한 가을바람을 얼굴로 받아내며 숨이 막힐 것처럼 시원한 공기를 폐에 한가득 머금는 생생함이다.


가속이 붙은 발걸음에는 동물적인 순발력 또한 일품이다.


여기저기 규칙적이지 않게 나열된 사람들과 돌발적으로 끼어드는 방해인들에 대한 판단과 대비능력은 스스로 정수리를 한없이 쓰담해주고 싶을 정도로 기특하다.


하지만 이도저도 못할 자충수가 펼쳐진 상황, 이를테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까지 RPM을 높여가며, 수많은 난관을 무찔러가며, 온몸 전체에 짜릿한 쾌감을 전하며,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직전, 천재적 동물적 순발력도 무기력할 만치 사방이 방해물들로 둘러 쌓여버리는 상황 따위가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때면 전방 5미터 전부터 슬슬 브레이크를 걸어 가속에 제어를 해야 했는데 갑자기 늘어져야 하는 현실에 울화가 치민다.   


불도저처럼 무식하게 주변을 밀어내고 속도를 올리고 싶은 열망으로 머리에 열이 오르자 두피가 간지러워진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초능력과 무식스러운 용감함 따윈 없다는 자각이 일면, 미칠 듯한 욕망과 화가 일구어낸 욕지기는 자괴감으로 물들어 그 위력을 상실한 채 스멀스멀 스러진다.


다시금 떨궈진 열정은 바닥으로 떨궈진 시선만큼이나 무기력해진다.

이전 11화 길 위의 이쁜이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