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행인 아이들과의 여행을 다녀온 뒤 한동안 여행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내가 가장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에세이였고, 여행 에세이로 한 번 상을 받았기에 자신감도 충만했었다. 한 장, 두 장 쓰면서 내가 여행으로 사십춘기를 어느 정도 이겨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는 아니었다. 나의 모든 것을 풀기에 에세이는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였다. 내가 넘볼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
소설. 죽기 전까지 소설이라는 분야에는 절대 발을 담글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은 저 우주 너머에 있어 내가 근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생각해봤다. 굳이 존경하는 그분들의 글처럼 내 글도 훌륭해야 할까?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다. 어떤 시놉시스도 짜지 않았고, 머릿속을 스치고 간 한 문장으로 무턱대고 소설을 시작했다. 그 한 문장은 이렇다.
"나... 사십춘기 왔나 봐."
사춘기 딸과 사십춘기가 온 엄마가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순간 나온 엄마의 첫 한 마디.
사춘기는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게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 정도 왔을 때 겪는 사십춘기는 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십 대들 이 겪는 이 허무함에 대해 왜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사십 대가 되면 매우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줄 알았는데 걱정거리들은 과거가 되어 미소 짓게 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거리로만 가득하다.
소설은 사십춘기가 온 여성들이 어떻게 삶을 바꾸어 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남편과 시댁, 때론 사춘기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싶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에 모든 등장인물들 속에는 내가 존재하고 있고, 또 다른 이가 존재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존재할 수 있다. 나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소설에서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소설이기에 스토리는 허구이다.
소설의 제목은 <사십춘기가 왔다>이다. 이 소설을 쓰며, 매일 5시간 이상 글을 쓰고 수정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소설을 완성 했다. 내가 도전하고자 했던 것은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 꾸준히 적었다는 것, 결국 완결을 지었다는 것. 그것이었다.
소설을 적는 내내 나는 가슴 충만함을 느꼈고, 내 안의 나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내가 사십춘기로 힘들어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그럼 된 거다.
여행으로 반 정도 치유된 나의 사십춘기는 소설로 인해 치유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일 년에 네 번 갈 수도 소설을 적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떠났고, 이야기할 곳이 마땅치 않아 글로라도 쓰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썼다. 벼랑 끝까지 몰리다 보니 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나를 되찾고는 "야호!" 하고 크게 외치고, 하산하고 있는 중이다. 행복하게. 다시 나를 만난 것에 미소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