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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Nov 10. 2021

매혹 그리고 중독

혼자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 차를 세우고 싶을 때 맘대로 세울 수 있어서다.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것도 좋아한다. 운전할 때 못 보는 바깥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그날은 조수석에서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집 근처 팔현마을을 지나는 데 길가에 핀 산국이 눈을 사로잡았다. 운전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속으로 외쳤다. 좋았어! 있다 산책 나올 때 저 꽃을 보러 와야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산책 코스가 다 짜였다.


집에 도착하자 마음이 급했다.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언덕 기슭에 핀 산국이 있던 자리는 남서쪽. 그곳은 이미 해가 기울어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걷기 시작해도 30분은 족히 걸릴 텐데... 30분 후엔 완벽하게 그늘이 질 텐데... 햇빛이 없는 곳에 핀 꽃이라... 빛이 얼마나 중요한데... 햇빛 비치는 아침에 갈까? 에이, 일단 가서 확인해 보자.


거창한 목표를 가진 사람처럼 한 무더기의 산국을 향해 팔다리를 재게 휘저었다. 차로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산국의 자태가 지워지지 않았다. 메마르고 시든 갈색 배경에 빛바랜 노란색으로 핀 산국은 내 눈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작은 꽃송이가 점점이 흐드러지게 핀 모양이 안개꽃 같기도, 눈이 흩뿌려진 모양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나는 선명하고 정확한 것보다는 흐릿하고 모호하며 규칙적이지 않은 데 더 끌리는 가 보다. 나를 매혹시킨 꽃 한 무더기를 향해 날듯이 걸었다.


걷는 코스를 언급하자면 차로 왔던 길이 산국에 닿는 최단코스이지만, 중간에 위치한 '비 내리는 고모령'에 인도가 없어 산책길로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고로 망우당 공원 - 다리 - 강변 - 고모들 - 패밀리파크 - 팔현마을 코스로 가야 한다. 나의 통상적인 산책 코스는 패밀리파크 주변까지다. 한 코스 더 가야 하니 무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미 매혹되었지 않은가. 매혹된다는 건 자신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걷잡을 수가 없는 거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한다. 안 그래도 할 일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혹자에겐 팔자 좋은 신선놀음이라 비칠 수도 있고. 사소한 데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고 자부하지만 마음 한편에 이런 자격지심이 도사리고 있다가 문득문득 고개를 치켜든다. 이 단락은 대놓고 공감을 얻고 싶어 꾸역꾸역 집어넣은 거라고 본다. (내가 쓰면서 내가 평가하고~)


그러구러 패밀리파크에 도착했다. 이제 산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꽃을 만날 수 있다. 산을 면하고 있는 공원 입구에는 산그늘이 져 있었다. 입구를 지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산 아래쪽이 뭔가 환했다!

산그늘이 진 자리인데도 그곳만은 화사하고 밝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곳은 온통 꽃! 꽃 천지였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뭐야!


난 눈이 휘둥그레진 채 홀린 사람처럼 꽃에게 다가갔다. 노랑, 분홍, 주황, 하얀, 귤색, 자주, 연분홍, 미색... 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목표했던 산국 무더기보다 훨씬 큰 산국 꽃더미들이 비탈 위쪽에 포진해 있고 그 아래 형형색색의 국화꽃들이 방실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진한 국화향기까지. 난 완전히 매료돼버렸다.

하! 너넨 어쩜 이렇게 예쁘게 피어 있니?


햇빛이 산 너머로 넘어갔기에 꽃밭 자리는 응달이었다. 그럼에도 꽃의 생생하고 맑은 기운으로 그늘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꽃은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 마련인데 해가 넘어가서인지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긋방긋, 방실방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갓 피어난 꽃의 또렷하고 선명한 모양과 빛깔에서 생명력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흐릿하고 모호한 데 더 끌린다고 했던 게 무색했다. 나 알록달록 쨍한 색 좋아하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눈에, 폰 카메라에, 숨에, 가슴에 꽃을 담았다. 자그마한 꽃도, 동글동글한 꽃도, 꽃잎이 길게 갈라진 꽃도, 커다란 꽃도, 봉오리 진 꽃도, 마른 꽃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성된 꽃밭에는 일정한 구획을 나눠 꽃이 배치되지만 이곳은 각양각색이 뒤섞이며 어우러져 있어 더 귀하게 보였다.


한참 빠져 있는데 비탈 위쪽에서 미색 꽃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듬성듬성한 꽃 사이로 길이 나 있는 것도 보였다. 기다려, 금방 올라갈게. 미색 꽃을 향해 비탈을 올라갔다. 찰칵찰칵. 예쁜 모습을 찍어주는데 꽃 아래에서 갑자기 푸닥닥 소리가 났다! 들고양이였다. 아유, 놀래라. 몸집이 커다란 그 녀석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알고 보니 꽃 뒤에 고양이집이 있었다. 누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망가지도 않고 째려본 것이었다. 아, 내가 너희 집에 마음대로 들어간 거구나. 미안하다. 나 얼른 내려갈게. 미안. 어쩐지 길이 나 있더라니. 고양이 집 전망 한번 끝내주네. 이 예쁜 꽃밭이 앞마당이라니. 


꽃밭에서 실컷 머물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처음 계획보다 가까운 데서 더 좋은 꽃밭을 발견한 것이 무척 뿌듯하고 기분 좋았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그 꽃밭에 갔다. 찍었던 걸 또 찍었다. 어제 꽃과 오늘 꽃은 다르니... 한마디로 꽃에 중독되었다. 원래도 꽃 마니아였지만 이번 중독은 강도가 셌다. 시간대별로 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 아침, 점심, 오후 다르게 찾아갔다.(물론 하루에 이렇게 간 건 아니다)


중독의 고리는 어제부로 끊어졌다. 비가 오고 찬 바람이 불고 나니 꽃들은 급격히 시들었다. 늦게 피어난 꽃송이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늙어 있었다. 날개소리 합창을 들려주던 꿀벌들도 찾지 않았고, 향도 거의 없었다. 꽃 향기는 갓 피어났을 때 가장 진하다. 전성기를 지나는 동안 향기를 한껏 뿜어냈겠지. 저무는 꽃에는 남은 향기가 없었다.


시든 꽃을 보고서 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를 마주하는 것 같아 똑바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시장에서 나물 팔던 할머니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난 요새 거울 안 봐. 쭈글쭈글 내 얼굴 꼴도 보기 싫어."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도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래. 에휴, 세월이 야속하지."

돈을 건네던 내가 "지금도 고우신데요, 뭘." 하니 할머니들이 까르르 웃으셨다.

예의상 한 말이었다. 할머니들의 말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에 콱 박혔다. 정말 그렇게 느껴지겠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를 보기 싫어 할 날이 오겠구나. 나를 포함한 누구나, 언젠가...

그때 박힌 돌덩이의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아프고 시든 것은 보고 싶지 않아. 피하고 싶어도 어차피 맞이할 테니까. 지금도, 거울이 보기 싫을 때가 있으니까.


글의 결론이 점점 가을스럽게 바뀌려고 한다. 역시 가을의 위력은 보통이 아니구나. 센티함을 넘어 비관으로 끌고 가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난 그 계략에 끌려가지 않을 테다. 한두 번 맞는 가을도 아닌데 뭐. 살다 보면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는 거지. 계절의 분위기에 맞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보면 쓸쓸함을 즐기는 여유도 생기는 법이다.


가을 오후, 나를 매혹시키고 중독시켰던 꽃들의 쨍하고 화사했던 시절을 넘겨보며 쓸쓸한 여유를 즐겨본다.       


아래에 글에 담긴 꽃 사진 몇 장을 첨부합니다. 꽃에 별 관심 없는 분은 안 보셔도 무방합니다.
두 친구에게 꽃 사진 한 장을 보여줬더니, 한 친구는 폰을 넘겨받아 수십 장 찍은 사진을 일일이 넘겨 보며 감탄했고 또 한 친구는 '이 비슷한 걸 뭘 이리 많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꽃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photo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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