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셰프 속 붓꽃 마법

움켜쥐는 대신

by 한꽃차이

"진짜 꽃인가 해서.."

프로포즈 꽃장식을 마친 날. 남은 꽃들부터 차 옆에 두었다. 다른 짐들을 가지러 다녀오니 동네 할머니께서 꽃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계신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쭉 빼서. 향기가 나는가 궁금하셨던 듯하다.

"네! 여기 스튜디오 장식하고 남은 꽃이에요."

종종 센스와 순발력이 부족했다며 이불 킥하곤 하는 나인데, 그 순간은 재빨리 다음 말이 나왔다. 꽃을 나눌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다짐해 두어서일까.

"꽃 조금 드려도 될까요?"


"아유 고마워요. 진짜 좋겠네. 이런 예쁜 일을 하고."

참말이지 진짜 좋다. 이런 일을 하는 덕분에 이런 나눔을 하는 순간이. 누군가의 며칠을 향기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지구 한 구석,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 꽃밭을 만드는 기쁨이.


플로리스트 업계에는 유난히 젊은 사람들이 많다. 지원하고 싶은 자리가 있어도 대개 나이에 걸린다. 포트폴리오와 경력을 웬만큼 쌓아도 어마어마한 능력자들이 많고 많다. 자주 벽에 부딪힌다.


이렇게 막힐 때마다 할머니에게 받은 말꽃을 떠올려야지, 하며 마음 화병에 꽂아둔다. 꽃을 든 할머니 손길처럼 소중히. 반대로 생각하면 이르지 않은 나이에 시작해서 이만큼 개척하며 오래 일하고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 할머니의 말꽃에 다시 한번 무릎을 펴고 일어설 순간들이 기다려진다.

어느 꽃을 드려야 오래 보실까. 얼른 아이리스를 집어든다. 어제는 몽우리였는데 방금 피어났으니. 원래가 2주는 피어있는 꽃이기도 하다.

"아이리스예요."

"아이..."

"붓꽃요. 오래갈 거예요."

"붓꽃... 예쁘네."


다른 짐들을 더 가지고 온 사이, 할머니는 붓꽃을 신생아 안듯 소중히 들고 조심조심 손끝으로 쓰다듬고 계신다. 소녀처럼 반짝이는 눈빛, 살짝 올라간 입꼬리. 무엇보다 마치 케데헌의 한 장면처럼 심장에서 잔잔한 등불이 켜져 온몸을 물들이고 있다. 몇 년을 수천번을 보아도 경이롭다. 그래, 이 광경을 보려고 내가 꽃을 하지.

얼마 만에 받으신 꽃일까.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 더 설레시길. 붓처럼 뾰족이 모아진 몽우리가 이토록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활짝 피어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듯이.

붓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보통 보라색이 익숙하다. 직접 보았거나, 고흐의 그림 속에서 만났거나. 꽃잎 안 쪽 노란색, 어느 꽃과도 비슷하지 않은 화려한 모양이 고흐의 화풍과 완벽히 어울린다.


또 다른 이름, 아이리스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에서 유래했다. 신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무지개 여신이다. 그래서 꽃말이 기쁜 소식.

요즘 인기 높은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서 보았을 수도 있겠다. 외롭고 불안하던 흑백톤 삶에 무지개처럼 찾아와 웃게 하는 여인, 그 여인이 마음 안정에 좋다며 준 선물로.


"붓꽃이라.." 하면서 힘을 빼고 쓰다듬는 왕의 손길에서 그녀의 존재가 주는 의미가 전해진다. 호박넝쿨을 받았더라도 두근거리며 바라보았을 만큼 사랑에 빠졌겠지만 말이다. (제일 덜 예뻐 보이고 이름도 낭만과는 거리가 먼 풀을 꽂아보는 이 상상으로 결혼 14년 차 플로리스트는 혼자 웃는다) 그가 이렇게 살금살금, 초속 0.5cm로 닿아본 생명체가 또 있을까. 왕에게 필요했던 건, 움켜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따스하게 바라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온기였다.


더 끌어모아야 만족이 있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 자꾸 멀리 내다보고 널리 뻗어가려는 마음 대신 선택하기로 한다. 주어진 하루를 곁에 있는 사람을 마주치는 사람을 내 탁자에 꽂혀있는 꽃처럼 여기기로. 한번 더 바라보고 한번 더 물을 갈아주기로. 어쩌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내 삶 속 진정한 꽃일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발음되는 아이리스도, 쉽게 기억되는 붓꽃도 좋다. 꽃시장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기쁜 소식 한 송이' 들여놓아보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붓꽃 같은 기쁨을 건네는 일을 꾸며본다면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좋아하고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라도, 혹은 거칠고 까칠한 사람이라도. 꽃은 예외 없이 마음을 녹이는 경이로운 마법을 부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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