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 유치원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기억에 남는 행사들이 정말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망설임 없이 12월에 있었던 어린이 학예회를 꼽을 것이다.
와세다 유치원의 어린이 학예회는 아이들이 한 달여가량 준비한 연극을 부모님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였는데 사실 이런 행사는 한국의 유치원에서도 많이들 하기에 나는 딱히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세상에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어디 하나 놀랍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우선은 작품 선정 방식부터 달랐다. 학예회 날 아이들이 선보인 연극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무척이나 낯선 작품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들이 평소에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동화책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으로 함께 의논하여 고른 것이라고 했다. 대본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대본을 짜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 아이들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외워서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작품을 골랐듯 대본 역시 다 같이 읽었던 동화책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서로 의논하여 함께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연극을 준비하는 한 달여 정도의 시간 동안 대사도 등장인물도 그리고 누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에 대한 역할 분담도 아이들의 의견에 따라 수시로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극에 필요한 각종 무대장치와 소품, 그리고 무대의상까지도 모두 다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해에 선보인 연극은 아이들이 꿈속에서 마법의 숲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일생일대의 모험을 마치고 다시 꿈에서 깨어난다는 내용이었는데 아이들은 각종 도화지와 색종이, 비닐봉지 등등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역할에 맞게 너무도 깜찍한 소품과 의상들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중에서도 공주님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 핑크색, 파란색 등등의 비닐 포대와 색색의 리본 끈으로 너무도 귀여운 드레스를 만들어 입은 것을 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마법의 숲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주는 옷장, 숲속의 나무, 공주님들이 갇히게 되는 감옥까지 하나하나 다 아이들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무대 장치들을 보면서 모든 일에 아이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와세다 유치원 특유의 교육방식에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연극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여느 때처럼 늘 각종 행사가 열리던 유치원 2층의 강당에서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1층 교실에서 준비하는 동안 2층에서는 원감 선생님께서 빔프로젝터로 뭔가를 준비하느라 한참이셨다. 도대체 뭘 보여주시려는 걸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이들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아이들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따로 보여주실 줄이야.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사진과 영상을 하나하나 보여주시면서 이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 아이디어는 누가 냈는지 아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협동하여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아주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하나하나 웃으며 설명해주셨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깔깔대고 웃으면서 하나의 결과물을 향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해 가는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그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주의 깊게 지켜보고 계셨을 선생님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 역시 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뒤이어 진행된 아이들의 연극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객관적인 시각에서 결과물만 놓고 보자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공연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직접 만든 대본은 어딘가 좀 엉성했으며, 폐품 박스에 종이를 붙여 어설프게 만든 커다란 옷장과 색색의 비닐 포대에 리본 끈을 붙여 장식한 공주님들의 촌스러운 드레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어색하기만 하던 아이들의 연기까지 정말이지 세련됨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던 그런 공연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렇게 어설프고 촌스럽고 어색했기에 그 공연은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이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자신들의 손길이 닿아 있던 그 연극에 큰 애정을 느끼는 듯했고, 그래서인지 연극을 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와세다 유치원의 대부분의 행사가 다 그러하듯 이 공연 역시 학부모들의 사진 촬영이 일절 금지되어 있었던지라 학부모들이 사진에 대한 부담감 없이 아이들의 공연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는 점도 역시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꼭 내 아이의 차례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직접 만든 대사와 의상, 소품들을 구경하며 미소 짓느라 단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던 그런 공연이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이 공연을 준비하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늘 주목받기를 좋아하던 작은 아이는 이 연극의 주인공 격인 모험을 하는 아이 중 한 명을 맡았는데 연극 준비를 어찌나 좋아했던지 일본어로 된 자기 대사는 물론이고 친구들의 대사까지 대본을 통째로 다 외워서 집에서도 혼자 일인다역을 맡아 수시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다 진행할 정도였으니 아이가 그 연극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굳이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워낙에 키가 작고 애교도 많아 유치원 친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던 큰아이는 공주님들과 함께 다니는 강아지 역을 맡았다. 세상에, 공주님도 아니고 공주님과 함께 다니는 강아지라니 다른 역할도 많고 많은데 무슨 이런 역할을 맡았단 말인가. 원작에 정말 그런 역할이 있기는 했던 걸까? 아마도 반 아이들이 큰아이에게 강아지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생각해서 일부러 만들어낸 역은 아니었을까? 아이가 연극에서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나는 도무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드디어 공주님들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 바로 그 순간 나는 아이들이 도대체 왜 큰아이에게 그런 역할을 맡겼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아이는 정말 강아지처럼 네발로 기어 나와 너무도 해맑은 모습으로 멍멍멍 짖으며 무대를 뛰어다녔다. 아이가 연극 스토리도 잊고 지나치게 오래 뛰어다니는 바람에 공주님들마저 나서서 이 강아지를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진정 메소드급 연기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하.
큰아이의 등장과 함께 관객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렸고 학예회가 끝나고 난 뒤에도 많은 일본 엄마들이 몇 번이나 내게 다가와 큰아이의 그때 그 강아지 연기에 대해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건넬 정도였으니 비록 대사는 ‘도와주세요!’라는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이보다 더 강렬한 씬스틸러(주연을 능가하는 조연)가 또 있을 수 있었을까.
아이는 요즘도 와세다 유치원의 그때 그 학예회 이야기를 꺼내면 공주님들과 함께 발레를 해야 했던 건 정말 최악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한다. 하지만 연우야, 이것만은 기억해두렴. 그때 그 순간 너는 엄마 눈에 세상 그 무엇보다 더 반짝이는 존재였단다!
와세다 유치원의 어린이 학예회는 결과보다는 과정, 겉모습보다는 내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르침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하는 자율성이라는 일본의 취학 전 공교육이 추구하는 가치와 덕목을 너무도 매력적으로 여실히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행사였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멋지고 예쁜 모습을 마음껏 뽐내는 작은 공주님과 왕자님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무대를 모두 기획하고 만들고 완성해 간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배우이자 연출가, 극작가, 그리고 또 무대와 소품 디자이너까지 수많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이 22명의 재능 많은 꼬꼬마들, 그리고 그 꼬꼬마들이 보여준 내 인생에 다시없을 그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을 나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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